소녀를 산산조각 낸 허상과 맹신[책과 삶]
신을 죽인 여자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 엄지영 옮김
푸른숲 | 424쪽 | 1만8500원
몸이 끔찍하게 토막난 채 불에 탄 17세 소녀, 아나 사르다의 시체가 발견된다.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는다. 아나의 가족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은 30년이 지난 시점에도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소녀를 죽인 범인은 누구일까.
<신을 죽인 여자들>은 아르헨티나의 작가 클라우디아 피녜이로가 쓴 범죄소설이다. 소설은 아나의 주변 인물 여섯 명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이들에게 아나는 각기 다른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나의 둘째 언니 리아 사르다에게 아나는 ‘침대로 기어들어와 나 말고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비밀을 속삭이던’ 귀여운 동생이다. 아나가 죽던 현장에 함께 있다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마르셀라에게 아나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친구였다. 아나의 사건을 담당한 법의학 수사관에게 아나는 초보 수사관 시절 ‘의문을 남긴 시체’다. 범인이 시체를 토막내는 경우는 많지만, 토막을 낼 때 팔과 몸통을 분리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여섯 인물들의 독백 같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범인과 만나게 된다.
소설 전반에 종교적인 색채가 짙게 녹아 있다. 사르다 가족은 매우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다. 리아는 아나가 죽고 무신론자가 된 뒤 거의 모든 가족과 연락이 끊긴다. 어릴 적부터 매력적인 외모와 태도로 모두의 선망을 받았던 큰언니 카르멘은 세 자매 중 가장 믿음이 강하다. 인간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어떤 일까지 벌일 수 있을까.
클라우디아 피녜이로의 책은 아르헨티나 작가로는 보르헤스 이후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 출간됐고, 발표한 작품 대부분이 영상화됐다. <신을 죽인 여자들>은 2021년 범죄소설 분야의 권위 있는 대실 해밋상을 수상했다.
김한솔 기자 hans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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