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부정 주장하다 몰락…‘美의 시장’ 줄리아니 파산
1980년대 마피아 소굴이었던 미국 뉴욕의 범죄를 소탕해 한때 ‘미국의 시장(市長)’으로 칭송받던 로버트 줄리아니(79) 전 뉴욕 시장이 21일(현지 시각) 법원에 개인파산 신청을 했다. 측근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2020년 대통령 선거 패배를 부인하며 개표 조작 주장을 폈다가 명예 훼손으로 피소돼 2000억원에 달하는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받으면서다. 내년 미 대선의 유력한 공화당 후보로 부상하는 트럼프와 달리, 그를 변호하다 수많은 소송을 당한 줄리아니는 급기야 비용을 감당 못해 파산할 정도로 몰락했다. 줄리아니는 뉴욕 검사 시절 ‘범죄와의 전쟁’으로 스타가 된 후 1994~2001년 뉴욕 시장으로 일하며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2020년 대선 결과를 인정하지 않은 트럼프의 변호를 맡았던 줄리아니는 전(前) 조지아주 선거 요원 루비 프리먼과 셰이 모스가 개표 조작에 가담했다는 주장을 2021년 폈다가 이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피소됐다. 이들은 줄리아니의 주장으로 “생명의 위협까지 당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20일 베릴 하웰 미 워싱턴 DC 연방법원 판사는 줄리아니가 원고에게 1억4800만달러(약 2000억원)를 배상하라고 선고했고, 줄리아니는 다음 날 “파산 보호를 받은 상태에서 항소하겠다”며 파산 신청을 했다. 법원이 파산 신청을 받아줄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토박이 뉴요커들은 한때 ‘강한 공권력의 상징’이었던 줄리아니를 기억하며 소송의 추이를 씁쓸하게 주목하고 있다. 줄리아니는 뉴욕에서 한 해 2000명이 총기로 사망하던 시절인 1983년 뉴욕 남부지검장으로 취임했다. 조직폭력배, 마약상 수뇌부를 가차없이 기소하는 등 범죄와의 전쟁을 벌였다. 시장 취임 직후엔 작은 일탈을 내버려두면 더 큰 범죄를 부추긴다는 ‘깨진 유리창’ 이론을 적용해 노상 방뇨, 낙서 등 사소한 범죄도 강력하게 처벌하면서 뉴욕 거리 풍경을 ‘청소’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임기 마지막 해인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자 줄리아니는 전립선암으로 투병하면서도 사고 현장에서 안전모와 마스크를 쓰고 앞장서서 사태를 수습해 찬사를 받았다. 주간지 타임은 2001년 ‘올해의 인물’로 그를 선정했고, 뉴스위크는 그를 “우리의 윈스턴 처칠”이라며 “위기 대응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설정했다”고 했다.
뉴욕 시장에서 물러나고서 막대한 수임료를 받는 법무법인(로펌) 변호사로 일한 줄리아니는 한때 사치스러운 뉴욕 갑부의 삶을 살았다. 2007년 공개된 줄리아니의 순자산은 3000만달러에 달했다. 2003~2019년 함께 산 셋째 부인과 이혼할 당시 드러난 지출 명세에 따르면 이들 부부는 한 달 평균 23만달러를 썼고 집 여섯 채, 골프장 회원권 11개를 보유하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2018년 5월 당시 대통령이던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로 일하러 로펌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줄리아니의 승승장구하는 삶은 지속될 듯 보였다. 하지만 이듬해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당시 민주당 유력 대선 후보였던 조 바이든 부자(父子)의 비리를 조사하라고 압력을 넣었다는 의혹, 나아가 2020년 대선 개표조작설 확산의 주범으로 줄리아니가 지목되면서 그는 개인이 감당하지 못할 배상금을 잇달아 선고받으며 소송 비용과 배상금으로 사실상 빈털터리가 됐다.
이번 파산 신청서에 나타난 줄리아니의 재정 상태는 처참했다. 미 언론이 보도한 신청서 내용에 따르면 줄리아니는 전일 선고된 배상금을 포함해 빚만 5억달러다. 미납한 세금은 총 100만달러에 달하고, 지난 몇 년 동안 그의 형사 사건을 담당한 로펌에 지급해야 하는 빚도 수백만 달러에 이른다. 최근 그는 짧은 홍보 영상 메시지 한 건을 325달러 정도 받고 파는 부업을 할 정도로 살림살이가 곤궁하다고 알려졌다. 파산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빚은 어느 정도 탕감받을지 몰라도 배상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서 그가 화려한 옛 삶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워싱턴포스트 등에 따르면 트럼프와 줄리아니는 1989년 줄리아니가 처음 뉴욕시장 선거에 나왔을 때 트럼프가 기금 모금 공동 의장을 맡고 3000달러를 기부하면서 공식적인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관계가 깊어진 것은 2008년으로 지목된다. 줄리아니는 공화당 대선 후보 중 선두를 달리다 존 매케인 상원의원에게 밀려 결국 경선에서 떨어진 후 트럼프의 플로리다주 별장에서 약 한 달간 지내며 가까워졌다. 줄리아니는 이후 대선에 출마한 ‘정치 신인’ 트럼프를 도와 그의 당선에 일조했다. 모두의 예상을 깬 짜릿했던 승리는 결국 줄리아니의 삶을 소송으로 짓눌리게 하는 일련의 사건으로 이어졌다.
트럼프가 대선에서 탈락한 데 이어 동시다발적 소송을 유발한 사건이 이어진 2020년 즈음 줄리아니는 개인적으로 망신살이 뻗치는 아찔한 상황도 여러 번 경험했다. 영국 배우가 기획한 ‘몰래 카메라’에 속아 여성과 침실까지 들어가는 영상이 공개됐다. 그해 11월 기자회견에서 대선이 부정선거였다고 목소리 높여 말하던 중 ‘흑채’ 혹은 염색약으로 추정되는 ‘검은 땀’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사진이 찍혀 세계 언론을 장식했다. 다음 달엔 미시간주에서 열린 대선 불복 관련 청문회장에서 발언하다 방귀를 뀐 소리가 마이크에 포착돼 방송을 타는 일도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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