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박스 깔고 7시간째 앉아있어요” 폭설에 제주공항 2만명 발 묶여

제주=홍다영 기자 2023. 12. 2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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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주로 제설 마치고 오후 4시쯤 비행기 이륙 시작
순차적 운항 재개
폭설이 내린 22일 오후 제주국제공항 국내선 출발층 항공사 대기 창구가 항공권을 구하려는 이들로 크게 붐비고 있다. /연합뉴스

“아내와 동백꽃 구경하러 제주도에 여행 왔는데 폭설로 비행기가 결항돼 7시간째 기다리고 있어요. 공항 밖으로 나가려 해도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오도가도 못하고… 천재지변인데 어쩌겠습니까, 허허”

22일 오후 5시 30분쯤 제주공항에서 만난 박모(79)씨는 공항 대합실 한켠에서 신발을 벗고 박스를 깔고 앉아 이렇게 말했다. 박씨의 아내는 담요를 두른 채 누워 있었다.

전남 여수시에서 온 박씨는 3박 4일간 여행을 즐기고 이날 오전 10시 30분쯤 비행기를 타고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비행기가 결항됐고, 하루 뒤인 23일 오전 출발하는 항공편으로 비행기 표를 바꿨다. 박씨는 “공항 식당가에서 미역 정식을 먹으며 허기를 채웠는데, 계속 이곳에 있어야 할지 호텔을 알아봐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앞두고 폭설과 강풍이 겹치며 제주공항 항공편이 대거 결항돼 승객 2만여명의 발이 묶였다. 공항은 지친 표정으로 비행기를 기다리는 승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제주공항에 22일 오전 폭설이 내리고 있다. /홍다영 기자

◇”지쳐서 말할 힘도 없다” 돗자리 깔고 감귤 먹으며 기다려

항공사들은 항공편이 대거 결항되자 공항 곳곳에 ‘금일 제주공항 기상 악화로 일부 항공편이 결항됐습니다. 보항편 확정 시 문자 발송 예정입니다’ 등의 안내 문구를 붙였다. 제주공항 대합실에서 만난 승객들은 ‘기다리다 지쳤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경기 화성시에 거주하는 김모(55)씨는 회사 일로 제주도에 왔다. 이날 낮 12시쯤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비행기가 결항돼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씨는 “비행기가 있어야 돌아갈 텐데 언제쯤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밥도 못 먹고 지쳐서 말할 힘도 없다”고 했다.

대구에서 가족들과 제주도 여행을 온 김예나(33)씨는 “비행기를 1시간쯤 기다리고 있다”며 “눈이 많이 와서 아이들 신발이 젖었는데 발이 시려울까봐 걱정”이라고 했다. 제주시에서 3년째 거주하는 노모(25)씨는 연휴를 맞아 반려견과 서울에 가려 이날 오후 5시쯤 출발하는 항공편을 예매했다. 그는 “오후 4시쯤 도착해 2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는데 이제는 아무 생각도 안 든다”며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무한정 기다릴 것에 대비하는 승객들도 있었다. 서울에서 방문한 최모(63)씨는 “세 자매가 제주도에서 카페 투어를 하고 돌아가려는 길”이라며 “비행기가 늦어질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이소에서 돗자리를 미리 구매했다”고 했다. 승객들은 바닥에 앉아 햄버거나 감귤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고, 삼삼오오 모여 태블릿PC로 영화를 보는 모습도 보였다. 휴대전화를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 근처 ‘명당’은 인산인해였다.

폭설로 제주국제공항 활주로가 폐쇄된 데 이어 결항편이 속출하고 있는 22일 오후 제주공항 국내선 출발장이 결항편 승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고 있다. /뉴스1

◇제주공항 활주로 7시간 40분 운행 중단, 시민들 발 동동

항공편이 결항되기 전부터 이미 항공기는 대거 지연 운항했다. 이날 오전 6시쯤 서울 김포공항을 이륙해 제주공항으로 가는 항공기도 30분 늦게 활주로를 떴다. 김포공항 직원이 “폭설로 활주로가 얼어붙어 비행기가 지연됐다”고 말하자, 한 중년 남성 승객이 “결항될 수도 있느냐”고 물었다. 직원은 “장담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폭설이 내린 제주공항은 이날 오전 8시 20분쯤부터 눈을 치우느라 활주로 운영을 중단했다. 오후 3시까지 항공편 277편이 결항했고 4편이 지연 운항했다. 항공사 카운터에는 다른 항공편을 구하려는 승객들이 100m 넘게 줄을 서기도 했다.

제주공항 활주로는 운영 중단 7시간 40분 만인 이날 오후 4시쯤 재개됐다. 제주공항 측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제설 장비를 동원했다고 한다. 오후 3시쯤 운영을 재개하려 했지만, 승객이 타고 내리기 위해 항공기가 멈춰 서는 계류장 제설 작업이 늦어져 한 시간쯤 지연됐다. 항공기가 이륙할 수 있게 되자 먼저 김해공항행 에어부산 BX8100편이 이륙했다. 대한항공, 이스타항공, 에어부산, 제주항공 등도 순차적으로 운항을 재개했다.

폭설이 내린 22일 오후 제주국제공항 활주로에서 제설차량이 눈을 치우고 있다. /연합뉴스

◇제주 애월 사제비 눈 82.8㎝ 쌓여…”시내에 이렇게 폭설 내린 건 처음 봤다”

기상청에 따르면 제주도에는 지난 20일부터 많은 눈이 내렸다. 이날 오후 6시 기준 적설량은 한라산 삼각봉 92.3㎝, 제주시 애월읍 사제비 82.8㎝ , 서귀포 한라산 남벽 54.8㎝, 서귀포 표선 25.1㎝ 등이다.

피해도 속출했다. 이날 오전 8시 12분쯤 제2산록도로에서 30대 운전자가 몰던 차량이 눈길에 고립돼 구조됐다. 서귀포시 도순동에서 비슷한 시각 눈길 교통사고가 발생해 30대 남성이 다쳐 병원으로 옮겨지는 등 이틀간 시민 19명이 낙상 사고를 당해 119 구급대가 병원으로 이송했다.

제주도민들은 폭설로 불편을 겪었다. 한 택시기사는 “20년 넘게 제주도에 살았는데, 한라산에 눈이 쌓이는 건 봤어도 일반 도로와 주택가 곳곳에 이렇게까지 폭설이 내리는 건 처음 봤다”고 했다. 그러면서 “서울에 있는 30대 자녀가 연휴를 맞아 제주도에 방문하기로 했는데 비행기가 못 떠서 오기 어렵다는 연락이 왔다”고 전했다.

시민들이 22일 오후 제주공항에서 돗자리를 깔고 감귤을 먹으며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홍다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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