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완의 주말경제산책] 정부 무력화할 수 있는 슈링크플레이션
이번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드릴 말씀이 두 가지 있다. 오늘 내용은 대학교 1학년 경제원론 이상을 수강한 분이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슈링크플레이션(shrinkflation)이 너무 긴 단어라 '슈플'이라고 줄여서 칭하겠다.
슈플이란 가격은 두고 용량만 슬쩍 줄이는 것을 말하는데 요즘 이 슈플이 과자나 라면 같은 식품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다. 슈플은 실질적인 물가 상승이어서 정부는 불안해하지만, 소비자는 막상 큰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생산자가 하는 대로 속아주는 분위기다.
나도 저녁에 집에 갈 때 편의점에서 과자를 몇 봉지 사가는데 용량이 줄었는지 잘 느끼지 못한다. 큰 혼란 없이 슈플이 지나가는 것 같지만 슈플은 정부 정책을 무력화할 수 있는 무서운 현상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슈플은 시장 상황에 따라 재화 가격을 실시간으로 변동시키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과자의 봉지 가격은 그대로지만 단위 무게당 가격은 올라간 것이니까.
여기에서 대학교 1학년 때 배운 경제원론을 활용해보자. 정부가 사용하는 재정정책과 금융정책의 효과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 이론에 근거하는데 물가가 변하지 않아야 효과가 있다. 이를 물가의 경직성(price stickiness)이라고 하는데 물가가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해줘야 소득이 증가한다. 중앙은행이 이자율을 낮춰도 마찬가지다. 이윤을 추구하는 모든 기업은 슈플로 가격을 몰래 올리고 싶을 것이다. 따라서 내가 과자 봉지의 슈플을 잘 모르듯이 조용히 경제 전체에 슈플이 퍼져 있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음식이 늦게 나오고 여행을 갔을 때 호텔이 지저분한 것이 서비스업에서의 슈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슈플이 모든 산업으로 퍼지면 가격표에 쓰인 숫자는 그대로인데 실제로 물가는 상승해 케인스가 가정하는 가격 경직성이 깨지게 된다. 정부로서는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의 효과가 약해지니 큰 걱정이다.
정부 관료는 기업을 향해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정직한 행위가 아니다, 실태조사를 하겠다, 세무당국이 편법 회계처리를 들여다볼 수 있다 등의 압박을 기업에 가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기업은 1970년대 기업이 아니다. 정부가 이렇게 압박하더라도 준법 경영하여 영업하는 기업에 슈플 때문에 제재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 설사 소송으로 간다고 해도 정부가 승소하기 어렵다. 기업은 포장지에 내용물이 줄었다고 작은 글씨지만 버젓이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렇게 슈플이 발생한 데는 우리나라 정부의 시장과 물가에 대한 왜곡된 시각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개발 시대부터 직접적으로 물가를 통제해왔다. 2000년 이후 직접적인 물가 통제가 없어지는가 싶더니 2009년 4% 이상 인플레이션이 오면서 정부 부처별 물가 관리 품목이 정해졌다. 코로나19 이후 물가가 6% 이상 오르면서 정부는 다시 직접 물가 관리를 고려하기도 했다. 이들 모두 느슨한 형태의 직접 물가 통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생산자인 기업은 정부 눈치를 보느라 물건 가격을 인상하기가 쉽지 않다. 기업은 원유와 밀가루 같은 원료 가격이 오르면 슈플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정부의 비난이 억울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정부가 민간 기업에 한전이나 가스공사처럼 장기간 가격을 통제해 막대한 적자를 강요할 수도 없지 않은가. 올해 10월과 11월 연속 미국과 한국 사이에 보기 드문 현상이 발생했는데 11월 미국 물가 상승률(3.1%)이 한국 물가 상승률(3.3%)보다 낮았다. 6년 만에 일어난 현상이다. 이는 한국에서는 정치적 이유로 압박해 가격 상승을 미뤄온 반면 미국에서는 가격을 시장에 맡긴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치적 압력이 있더라도 정부는 생산자가 그때그때 자율적으로 가격을 결정하도록 허용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가격 인상을 미루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갑자기 모든 물가가 큰 폭으로 상승하거나 광범위한 슈플로 물가 조정이 실시간 일어난다면 정부의 재정정책이나 금융정책이 효과를 잃을 수 있다.
[김세완 이화여자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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