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조 유치했다고? ‘윤석열식 외교’ 수지맞긴 한가
편 가르기식 외교로 성과 어렵자 경제외교 선회
애초에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는지도 모른다.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강조하고, ‘편 가르기’의 최전선에 서면서도 세계를 상대로 ‘영업’을 하겠다고 했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치며 시작한 이 ‘모순적’ 행보에 일부 관료, 교수들은 권위를 더했다. ‘원래 그런 것이다’, ‘일반 국민은 이해하기 어려운 고차원의 영역이다’, ‘세상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가는 줄 아느냐’는 논리가 동원됐다. 그렇게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윤석열식 외교’와 함께한 1년이 지났다.
그 결과, 올해 한국사회는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아니면 말고’식의 전략을 써도 나라가 망하진 않는다, 아무나 전문가 행세를 해도 될 정도로 외교는 비전문적 영역이다, 국가 간 관계의 기본이 ‘주고받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등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교훈은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대체 ‘윤석열식 외교’가 무엇인지 한 번쯤 짚어봐야 할 때가 된 것 아닐까.
■해외 순방만 하면 투자 유치?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16번, 올해 들어서만 13번 해외 순방에 나섰다. 산술적으로 보면, 올해 한 달에 한 번은 한국이 아닌 세계 어딘가에 있었다는 뜻이다. “대통령이 한국에 너무 자주 오는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그는 순방 외교에 진심이었다. 이는 수치로도 확인 가능하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를 통해 공개된 내용에 따르면 윤 대통령 취임 후 올해 10월까지 정상외교에 사용된 예산만 651억원이다. 특히 올해는 예산으로 배정된 249억원을 다 쓰고 그보다 많은 예비비 329억원을 끌어다 썼다. 일단 대통령이 해외로 한 번 움직이면 약 44억원의 비용이 발생했다. 비용 논란이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은 “그동안 순방을 통해서 54억달러(약 7조원)라는 막대한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며 “거기에 순방 비용이 조금 든다고 해서 이런 투자 유치 활동을 멈추게 된다면 오히려 국가적 손해라고 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대통령실 논리대로라면 윤 대통령은 올해 해외 순방에서 오히려 돈을 벌어온 셈이 된다. 문제는 이를 두고 ‘엉터리’라는 비판이 제기된다는 점이다. 사실 정부와 대통령이 “투자를 유치했다”는 것부터 상당히 모호한 개념이다. 투자를 받는 주체가 정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설사 이를 수용한다고 해도 54억달러라는 수치의 실체가 문제다. 이미 대통령실이 말한 성과는 체결된 내용을 재탕한 것이거나 양해각서(MOU) 수준이란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HD현대중공업이 카타르에서 수주한 LNG(액화천연가스) 운반선 17척이다. 해당 사업은 39억달러(약 5조3000억원) 수준이다. 윤 대통령이 사우디·카타르를 순방한 시점은 지난 10월 21~25일이었다. HD현대중공업의 수주는 9월 말 처음 국내에 알려졌다. 이후 10월 16일 한국거래소 유가증권시장본부가 HD현대중공업 측에 ‘풍문 또는 보도’에 관한 조회공시요구를 했다. 회사는 “당사와 카타르에너지는 2023년 9월 27일, LNG운반선 17척에 대한 MOA(합의각서·Memorandum Of Agreement)를 체결했고, 본계약 체결 관련 세부사항을 검토 중에 있다”고 답했다. 일반적으로 MOA는 합의 직전에 사용하는데 MOU보다는 계약이 진척된 상황으로 인식된다. 그렇다면 시점상 대통령이 카타르를 방문해 ‘투자를 유치했다’보다 ‘국내기업이 사업을 확정 짓기 직전에 카타르를 방문했다’가 더 정확한 표현이 된다.
대통령이 해외만 나갔다 하면 우후죽순 체결되는 MOU를 성과라고 보기엔 더욱 모호한 구석이 있다. 2023년 정부가 홍보한 내용 중에는 윤 대통령이 아랍에미리트(UAE)에서 300억달러(약 39조원), 사우디와 카타르 순방에서는 모두 202억달러(약 26조원) 규모의 MOU 및 계약을 따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중동에서 유치했다는 502억달러(약 65조원)는 내년도 국가예산의 10분의 1 수준이다. 이대로면 윤 대통령은 한국에 있지 않는 편이 더 낫다. 해외로 나가면 천문학적 투자를 받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외교 천재’다. 그런데 대통령실조차 이 액수를 실제 성과로 넣진 않는다. 양해각서(MOU)가 정식계약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이미 한국사회가 상식으로 공유하고 있다. 특히 한국 기업, 정부가 해외에 돌려줘야 할 투자 및 지원까지 고려하면 외교 활동으로 인한 이익과 손실은 ‘계산을 어떻게 하느냐’ 정도의 차이가 된다.
실제로 국회에서 삭감됐지만 당초 정부는 내년도 공적개발원조(ODA) 예산으로 올해 4조5000억원에서 2조원(44.4%) 늘린 6조5000억원을 편성했었다. 예산 총지출 증가율이 2.8%인데 ODA 예산 증가율만 40%가 넘는다. 대통령이 돈을 벌러 나가는 것인지, 돈을 쓰러 나가는 것인지 헷갈린다는 지적이 근거 없는 말이 아닌 셈이다.
윤석열식 외교의 독특한 점은 이러한 측면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애초에 사업 주체가 될 수 없는 정부가 외교 성과로 ‘투자 유치’를 내세우면서 마치 정부가 기업을 견인하는 것처럼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쉽게 말해 한국 정부와 기업이 ‘한 팀’이 아닌 기업이 정권의 ‘들러리’가 되고 있다는 의미다.
■밥상을 차리는 것인가, 숟가락만 올리는 것인가
지난 12월 6일 부산 깡통시장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나타났다. 이날 이 회장은 떡볶이와 순대 먹방을 선보였다. 카메라를 보며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쉿’ 포즈를 취한 사진도 한 장 남겼다. 삼성전자 회장이 재래시장을 방문한 것은 사업 때문이 아니다. 일주일여 전인 11월 28일 ‘2030 세계박람회(EXPO·엑스포)’ 개최지 투표에서 부산이 최종 탈락한 것에 대한 후속 조치에 가까웠다. 정치인도 아닌 민간기업 회장이 국책 사업 실패 직후 부산에 나타난 것은 즉각 ‘동원’ 논란을 낳았다.
실제로 이날 깡통시장에 모인 것은 이 회장뿐만이 아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 최재원 SK 수석부회장, 류진 풍산그룹 회장(한국경제인협회장),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정기선 HD현대 부회장,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참석했다. 이들을 이끌고 시장에서 먹방을 선보인 것은 윤 대통령이었다.
부산이 엑스포 유치에 실패한 것은 한국 외교의 흑역사다. 단순히 탈락해서가 아닌 경쟁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 압도적 표차(사우디 리야드 119표·부산 29표)로 밀리면서도 막판까지 몰랐다는 점이 더 큰 문제였다. 판세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면 이는 정부의 책임이다. 문제는 엑스포 민간 유치위원장을 맡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비롯해 각 그룹 회장들이 대통령 특사로 외교에 깊숙이 발을 담갔다는 점이다. 윤 대통령은 엑스포 투표를 앞둔 지난 11월 24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의 한 한식당에서 재벌 총수들과 술자리까지 가졌다. 대통령과 함께 부산 민심을 달래기 위해 깡통시장을 찾은 총수들도 따지고 보면, 윤석열식 외교 실패의 책임자가 된 셈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올해 윤 대통령의 13차례 해외 순방에서 기업 총수가 1명 이상 참석한 사례가 무려 8차례에 이른다. 마지막인 지난 12월 11~15일 네덜란드 순방까지 이재용·최태원 회장이 함께했다. 특히 네덜란드는 세계적인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이 있어 더욱 주목받았다. 윤 대통령은 순방 직후 “전 세계가 양국의 반도체 동맹에 주목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쯤 되면 패턴에 가깝다. 윤석열식 외교는 한국 기업과 관련이 있는 국가에 해당 기업 총수와 방문해 MOU를 체결하는 형태를 반복한다. 기업 총수는 이를 위한 보조장치가 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가까워지는 정·경이 어떤 점을 경계해야 하는지를 고민한 흔적은 잘 안 보인다. 성과에 집중하다 보니 지켜야 할 선조차 넘어버리는 모양새다.
■개선이 될까
모든 것이 견제와 감시를 받는 현대 정치에서 ‘외교’는 마지막 남은 미지의 영역이다. 상대 국가가 있는 만큼 우리 정부의 입장, 행보도 기밀에 부친다. 확실한 것이 없다는 점은 공·과를 평가하기 어렵다는 뜻도 된다. 국내 정치의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역대 정부가 외교에서 돌파구를 찾은 건 그래서였다. 정권으로선 미국과만 잘 밀착해도 박수를 받을 수 있는 ‘꽃길’이 바로 외교 분야다.
집권 초반부터 30%대의 지지율에 머물러 있고, 뚜렷한 국정철학도 제시하지 못한 윤 대통령의 선택도 여기서 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자유와 규칙을 앞세운 이념대결이었다. 한·미·일 협력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문제는 기대만큼 미·중 경쟁이 심화되거나 세계가 신냉전 상태로 빠르게 재편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늦었지만 외교전략 전환이 필요해졌다. 실제로 윤석열 대통령이 외교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한 조태열 전 유엔 대사는 지난 12월 20일 “한·중관계도 한미동맹 못지않게 중요하다”며 “조화롭게 양자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념을 중심으로 한 외교가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집중한 것이 바로 경제외교다. 문제는 편 가르기 외교에 깊숙이 개입한 상태에서 성과를 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엑스포 유치 실패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마치 한국 홀로 전 세계 ‘절반’을 왕따시키는 모양새다. 이 문제를 가장 잘 파악한 것 역시 기업인들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좋든 싫든 아직 중국이 우리에게 최대 교역국”이라며 “미·중 갈등이라고는 하지만, 한국 기업보다 미국 기업이 훨씬 더 중국을 많이 방문하고 계속 투자를 약속하는 모습을 많이 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중 문제는) 감정적으로 생각할 이야기가 아니다. 완전히 이성적 게임”이라고 덧붙였다.
모순을 인정하고 바로잡아야 하지만 새해 전망이 밝지는 않다. 윤 대통령은 여전히 명분이 곧 실리라는 듯한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해외 순방 성과를 설명하며 “네덜란드는 규범 기반 국제질서를 이끄는 가치 선도국으로 핵심 협력 파트너”라고 말하는 식이다. 삼성이 없어도 네덜란드가 규범을 이유로 한국을 핵심 파트너라고 여길지는 돌아봐야 한다. 이러는 사이 미국 대선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밀리는 모양새다. 한국 옆에 아무도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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