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재벌의 떡볶이…밀실 밖으로 나온 ‘유착’
다시 봐도 괴이하다. 재계에선 “만화 같다”, “초현실적이다”라고들 한다. 지난 12월 6일 윤석열 대통령이 재벌 2~3세들과 함께 부산 국제시장을 찾아 벌인 일명 ‘떡볶이 먹방’ 얘기다.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중장년의 남성들이 시장 한복판에서 일렬로 대열해 떡볶이를 들고 있다. 짙은색 양복에 붉은 계열 넥타이로 ‘깔맞춤’까지 했다. “들어요, 들어” 대통령 한마디에 일제히 떡볶이를 먹기 시작한다. 대통령의 눈치를 보기도, 웃으며 열심히 먹어보기도 하지만 표정들이 이내 굳는다. 몇몇은 ‘냅킨’ 한 장 얻지 못했는지 손으로 연신 입가에 묻은 떡볶이 국물을 닦았다.
이 장면이 괴이한 건, 재벌 2~3세들이 오로지 떡볶이를 먹기 위해 거기에 갔다는 점에서다. 정말 그게 다였다. 국제시장 방문은 윤 대통령이 “시민들과 소통하고 상인을 격려하는”(대통령실) 자리였다. 엑스포 유치 실패 후 낙담한 부산 민심을 달래기 위해 기획된 정치행사다. 아무리 ‘제왕적 대통령’이라지만 21세기에 그것도 자신이 주인공인 정치행사에, 역시 권력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내로라하는 재벌가 오너들을 단체로 불러다가 세워놓고 떡볶이를 먹일 수 있는 대통령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리고 하나 더. 재벌들은 ‘바보’가 아니다. 윤석열 정부는 집권 3년차를 향해 가고 있지만, 재벌들은 선대 회장 시절부터 숱한 정권을 겪어왔다. ‘정치권력은 유한해도 기업권력은 무한하다’는 얘기가 거저 나온 게 아니다. 권력의 속성을 빤히 꿰고 있는 그들이 한편으론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이런 자리를 왜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을까. 역대 정권에서 ‘정경유착’은 대체로 ‘은밀하게’ 이뤄졌다. 그에 반해 만인 앞에서, ‘은둔의 제왕들’이 일제히 출동한 현장을 카메라까지 켜두고 실황중계한 이번 떡볶이 먹방은 분명 패턴이 과거와 다르다. 표면적으로는 격의 없이 소탈하게,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더 노골적이고 치명적으로 어쩌면 대한민국은 새로운 정경유착의 시대에 접어든 것일지도 모른다.
■尹은 재벌을 ‘동원’했나, ‘주고받았’나
한 재계 관계자는 정경유착에 대해 “기브 앤 테이크(주고받는것)가 핵심”이라고 짚었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거나, 받는 것은 정경유착이 아니라는 얘기다. 떡볶이 먹방이 공개되자 언론을 비롯해 각계각층에서 질타가 쏟아졌다. 대체로 “기업하기 바쁜 재벌 총수들을 왜 불러다가 ‘병풍’을 세우느냐”는 지적이다. 보수논객으로 유명한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대학 교수마저 기고문을 통해 “생사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기업 총수들이 시장에 가서 대통령과 ‘떡볶이 먹방 파티’에 동원됐다”며 “개발 초기의 권위주의 정부에서도 볼 수 없었던 대통령의 권력 남용의 일탈”이라고 비판했다
대체로 먹방에 동원된 총수들을 두둔하는 내용이지만, ‘기브 앤 테이크’ 관점에서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윤 대통령 입장에선 기업에 이미 많은 걸 줬기 때문에 먹방쇼 정도의 협조는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우선 지난 8월 15일. 윤 대통령은 광복절 특사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복권)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사면·복권) 등 경제인들을 대거 사면·복권했다. 덕분에 이들은 법률상 취업제한 규정 등을 딛고 등기임원으로 당당히 경영일선에 복귀할 수 있었다.
재벌들의 법인세도 깎아줬다. 2023년 윤 대통령은 법인세율을 최대 25%에서 22%로 인하하는 감세안을 추진했다. ‘재벌 감세’ 논란이 일면서 국회에서 격론 끝에 과세표준 구간별로 1%포인트씩 세율을 낮추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과세표준(사업소득의 세금을 계산할 때 기준이 되는 금액)이 3000억원을 초과하는 재벌기업 80여 곳의 경우 2024년 24%의 법인세율을 적용받는다. 찔끔 인하 같지만 삼성, SK하이닉스, LG전자 등은 많게는 수천억원가량의 법인세를 덜 내게 됐다. 윤 대통령은 법인세율 인하를 계속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는 지난 12월 17일 “법인세 추가 인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윤 대통령 계획대로 법인세율이 22%까지 내려갈 경우 기업들이 얻게 되는 절세효과는 6조원(2022년 기준)이 넘을 것으로 추산됐다.
이밖에도 많다. 한국노총, 참여연대, 경실련 등이 참여하는 ‘경제민주화양극화해소를 위한 99% 상생연대’는 지난 12월 19일 기자회견을 열고 “재벌 대기업 감세 특혜법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상생연대가 꼽은 재벌 특혜조치 중 ‘자회사 배당소득 비과세(익금불산입)’의 경우 국내 기업이 10% 이상 지분을 보유한 해외 자회사에서 받는 배당소득의 95%에 대해 비과세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법인세수 감소는 물론 재벌의 조세회피, 지배력 강화 시도 등 부작용이 나타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상생연대는 ‘K칩스법’에 대해서도 “재벌 대기업에 최대 25%의 세액공제를 부여한다”며 “반도체 특혜법”이라고 규정했다. 기업상속공제 적용대상 확대, 특수관계인과의 수출목적 거래에 대한 일감몰아주기 적용 제외 등도 대표적인 재벌 특혜법이라고 상생연대는 지적했다.
■“밀실에서 뛰쳐나온 새로운 정경유착 행태”
올해 재계에는 웃을 일이 별로 없었다. 2022년 하반기부터 본격화된 경기불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한해였다. 한국경제인협회가 지난 11월 26일 연합뉴스 의뢰로 국내 매출 100대 기업의 3분기 실적을 분석한 결과 영업이익이 작년 3분기 대비 20.6%(9조2295억원)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대한상공회의소의 2023년 5월 집계를 보면 국내 기업들은 2022년에 이미 전년(2021년) 대비 영업이익이 34%나 줄었다. 2년새 영업이익이 반 토막 난 셈이다. 신성장 분야로 꼽히던 2차전지(배터리)마저 주저앉았고, 반도체 경기 회복은 예상보다 늦어지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잇따른 감세 조치 등 기업친화적인 정책이 ‘가뭄의 단비’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정부가 금리 인상을 동결하면서 고환율에 따른 반사이익을 누리기도 했다. 2023년 1분기에 삼성전자를 제치고 최대 영업이익을 낸 기업 자리에 올랐다.
이재용 회장은 2023년 윤 대통령의 해외 일정에 7차례나 동행했다. 정의선 현대차 회장, 최태원 SK회장, 구광모 LG 회장은 각각 6차례 동행했다. 대통령 해외 일정에 동참할지 말지 최종 결정은 기업에서 한다. 각 기업은 일정별로 동행하게 된 사유 등을 따로 밝히지는 않는다. 총수들의 동행과 수행이 그 자체로 윤 대통령을 향한 ‘기브’ 성격인 것만은 분명하다. 윤 대통령 스스로 “경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누차 밝혀온 데다, 자신의 일명 ‘세일즈 외교’에 기업 총수만큼 어울리는 파트너도 없기 때문이다. 비행기 이코노미석을 마다하지 않고 유치전을 뛰어준 총수들 덕분에 국민 상당수는 엑스포 투표 개표 결과가 나오기 직전까지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윤 대통령이 네덜란드 순방에서 반도체 제조장비 기업인 ASML의 투자를 유치한 배경에도 오랜 기간 ASML과 긴밀한 사업관계를 유지해온 삼성전자가 있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김은정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현 정부 출범 후 경제·조세 정책들이 재벌들을 위해 마련되고 있고, 재벌 총수들은 당장 실익이 없더라도 향후 이권을 바라고 정권의 입맛에 맞게 ‘떡볶이 먹방쇼’ 등으로 화답하고 있는 모양새”라며 “과거 정경유착이 밀실에서 벌어졌다면 이제는 서로 이해관계가 맞는 정권과 재벌이 공개적이고 노골적으로, 새로운 정경유착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재벌들이 대통령에게 호응하고 나서는 이유가 일종의 ‘보험성’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재벌들은 윤 대통령이 정권 내내 사정기관을 통해 압수수색과 수사를 이어갈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라며 “떡볶이 먹방쇼 역시 눈도장을 찍어 미래에 총수에게 발생할지도 모르는 검찰 처벌이라는 재앙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결국은 회삿돈을 동원해 총수 자신을 위한 보험을 든 셈이 됐다”고 밝혔다. 전직 한 고위 재계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검찰 특수통으로 과거에 재벌, 기업 총수, 국회의원 등을 숱하게 불러다 수사하고 처벌한 경험이 있다”며 “이런 사람이 검찰, 공정위, 감사원 등 사정기관을 움직이는 대통령이 됐는데, 어떤 재벌이 동행 요구를 거부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정권과 기업 간 수평적 관계 정립해야
총수들이 대통령 해외 일정에 경제사절단으로 동행하거나 정부행사에 협조하는 일은 과거에도 많았다. 윤 대통령에 앞서 ‘세일즈 외교’를 자처했던 이명박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 49회(전임 노무현 대통령 24회)의 해외 순방을 다니며 자주 총수들을 대동했다. 박근혜 정부의 ‘창조 경제’에서는 광역지자체별로 특화개발전략을 마련한 뒤 이를 전담해 지원할 대기업을 정부가 지정하기도 했다. 이 전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이 총수들과 맺었던 ‘지근거리’는 훗날 정경유착 범죄로 드러났다. 전임 정부의 부패로 집권한 문재인 대통령은 총수들과 거리를 뒀다. 취임한 지 1년이 지난 뒤에야 총수들과 청와대에서 ‘호프 데이’를 열었는데, 워낙 만남이 적다 보니 그 자체로 큰 화제가 됐다.
윤 정부 출범 후 총수들이 대통령과 동행하는 것이 자의인지 타의인지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잦은 대통령실의 ‘호출’에 재계에서 우려와 피로감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A그룹 관계자는 “그룹 총수에게 시간이란 곧 자원과 같다”며 “경기불황인 시기라 지금은 더더욱 사업의 깊이와 영역을 키워야 할 시점인데 이렇게 자주 불려 다니다 보면 나중에 반드시 놓치거나 실수하게 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B그룹 관계자는 “국익을 위해 총수들이 나서야 할 때도 있고, 관제·정치행사에 총수들이 병풍 서는 것이 일정부분 관행이라고 해도 이번 떡볶이 먹방은 아무 명분도 없이 나가도 너무 나갔다”면서도 “요즘은 속된 말로 ‘오라면 가야지’ 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C그룹 관계자는 “올여름 잼버리 파행 때도 기업들이 물품을 후원해 사태를 수습한 기억이 있다”며 “기업들을 방패 삼아 거듭된 정권의 ‘실착’을 가려볼 수는 있겠으나 국민이 그 속사정을 모르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벌인 떡볶이 먹방을 또 다른 ‘퇴행’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김진방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는 “MB 정부 때도 대통령과 총수들이 비교적 자주 만났지만, 경제나 기업 문제라는 주제가 있었지 이번처럼 정치적인 목적으로 불러낸 적은 없었다”며 “대통령 정치행사에 총수를 불러 아랫사람 부리듯 대하는 모습은 과거 전두환 정권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재벌들도 먹방에 불려 다닐 정도로 정치권 눈치를 봐야 할 일을 애초에 만들지 않는 게 중요하다”며 “대통령을 만나 혜택을 얻고자 하는 생각 역시 버려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승호 이화여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정권과 기업이 정말 파트너로서 협력하려면 어디까지나 수평적이고 동등한 관계가 돼야 하는데 역대 정권마다 정권이 기업의 위에 있는 수직적 구조가 재현되고 있다”며 “지금 같은 구도라면 대통령은 정치적 부담, 기업은 비즈니스 부담을 가지게 된다. 양쪽이 수평적 관계를 형성할 때 국익을 위한 활동이 진정한 명분과 의미를 얻을 수 있다”고 밝혔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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