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무릅쓰고 난민을 지킨 마을···‘집단적 선’은 어떻게 가능한가[책과 삶]
나치 피해온 수천 난민들을 품은
프랑스 비바레리뇽 르 상봉 마을과
그곳에 달려와 어린이들을 지킨
귀족 청년 다니엘 트로크메의 선행
·
‘집단적 선’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사회과학이 아닌 오직 사랑뿐이다
비바레리뇽 고원
매기 팩슨 지음 | 김하현 옮김 | 생각의힘 | 528쪽 | 2만5000원
전쟁은 죽음과 폭력의 이름이지 선함의 이름이 되기 쉽지 않다. 인류학자이자 작가인 매기 팩슨은 주로 러시아 일대에서 연구를 진행하며 폭력과 전쟁의 이야기를 들어왔다. 구타와 살인, 강간에 둘러싸인 전쟁이라는 무대에서 살아가던 저자는 어느 순간 “더 이상 전쟁을 연구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상황이 안 좋을 때 선하게 행동한 공동체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진다.
어느 날 고모가 보내온 한 권의 책, 필립 할리의 1979년 작 <Lest Innocent Blood Be Shed: The Story of the Village of Le Chambon, and How Goodness Happened There(무고한 피가 흐르지 않도록: 르 상봉 마을 이야기, 그리고 그곳에서 어떻게 선행이 일어났는가)>는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39년에서 1945년 사이 프랑스 중남부에 있는 자그마한 고원인 비바레리뇽 지역 르 상봉 마을의 주민들은 나치 점령을 피해온 수백~수천 명의 난민을 품는다. 전쟁이 깊어지고 독일 경찰이 유대인을 색출하기 시작한다. 필립 할리의 책엔 농부, 상인, 성직자, 교사, 정치인 등 평범한 마을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난민들을 지킨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전쟁 상황에서 발현한 ‘집단적 선행’이란 낯선 행위가 저자를 비바레리뇽 고원으로 이끈다.
연구를 진행하던 중 그의 관심을 사로잡은 사람은 고원에서 난민 어린이를 위한 보호소 ‘레 그리용’(귀뚜라미들이라는 뜻)을 관리하던 다니엘 트로크메라는 이였다. 저명한 집안에서 태어나 교사 일을 하던 그는 레 그리용의 설립자이자 친척이던 앙드레 트로크메의 연락을 받고 비바레리뇽으로 달려온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이곳에서 아이들에 대한 교육 외에도 음식을 챙기는 것부터 잡다한 허드렛일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지키던 그는 결과적으로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는다.
이야기는 1940년대 다니엘의 상황과 저자가 이후 연구를 위해 다시 찾은 비바레리뇽 고원의 모습을 교차하며 진행한다. 다니엘이 부모님께 보낸 실제 편지의 내용이 중간중간 들어 있다. 그의 일과 고민이 녹아 있다.
“기금을 받으려면 보고서도 써야 하고, 사진도 찍어야 하고, 수학을 봐줘야 할 아이들도 있습니다. 아이들의 부모들과도 최선을 다해 연락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곳은 즐겁습니다. 아이들은 참으로 저를 행복하게 만들어줍니다.” “가족이 레 그리용을 방문한 아이들은 부모가 없는 친구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표현을 자제하더군요.” “저는 너무나도 혼자입니다. 늘 말하듯 저는 스무 아이의 아버지이고, 이 아이들에게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상황이 얼마나 오래 이어질까요?”
12세 나이에 이미 베를린, 빈, 브뤼셀, 덩케르크의 화재와 파리의 공습을 목격했고 어머니가 목에 ‘돼지 같은 년’이라는 글자를 달고 빈을 걸어 다녔던 것을 기억하는 페터, 경찰이 찾아오면 가축 도살장이나 나무둥치 사이에 숨는 법을 익히고 있던 소녀 파니 등 다니엘이 사랑했던 아이들의 이야기도 이어진다. 이런 아이들은 지금의 현실에도 팔레스타인이나 우크라이나의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 같다.
1943년 6월29일, 꼭두새벽부터 그가 역시 관리자로 일하던 보호소 ‘라 메종 드 로슈’에 기관총을 든 경찰이 급작스럽게 나타났을 때 아이들은 다니엘에게 “선생님을 잡으러 온 거예요! 뒷문으로 나가서 숲속에 숨어요!”라고 말한다. 다니엘은 “그럴 순 없어. 내가 그리용과 로슈의 책임자니까”라고 답한다. 다니엘은 아이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자신의 사명으로부터 한 치도 도망치지 않았다.
비바레리뇽 고원은 현재도 유럽 전역의 난민들을 품고 있다. 저자는 고원에 위치한 ‘망명 신청자 환영 센터(CADA)’에서 과거부터 이어지는 고원의 구조 활동을 조사한다. 고원에서는 지금도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푸드 뱅크에서 음식을 얻는다. 끔찍한 폭력의 기억에 시달리지만, 아이들은 과거의 다니엘처럼 그들을 돌봐주는 마을 사람들 속에서 전쟁의 기억을 조금씩 지워간다.
“과학이 이 모든 아름다움과 이 모든 두려움과 이 모든 경이와 이 모든 파괴를 왜인지 실제보다 더 작고 납작하게 만드는 방법을 내게 보여준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과학은 이 모든 것을 깔끔하게 눌러서 언어와 숫자를 부여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다니엘과 고원의 주민들이 보여준 선행을 저자는 도저히 사회과학적 방법론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느낀다. 그는 여전히 과학을 신뢰하지만, 어느 순간엔 사랑이라는 감정이 주는 순간의 진실을 믿어야 한다고 깨닫는다.
“다니엘은 작은 귀뚜라미들을 사랑했다. … 사랑은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것, 시도해야 하는 것, 매 순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이 습관이 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품성의 날줄과 씨줄이 되어서 언젠가 바람이 불고 경보가 울릴 때 그 품성이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고희진 기자 go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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