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임금 허약해지자 약으로 권했던 술…2030 사재기에 없어서 못판다 [기술자]

이상현 매경닷컴 기자(lee.sanghyun@mkinternet.com) 2023. 12. 22.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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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에서 박재서 명인(대한민국 식품명인 제6호)이 빚어내는 안동소주. 소주와 소고기, 그리고 문어를 함께 즐길 때에 그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이상현 기자]
“어르신, 이거 너무 싸게 파시는 거 아니에요?”

전통소주 장인 한 분이 맛보라며 건네주신 술잔을 받아 들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높은 도수의 증류주를 종종 즐기는 저였지만, 그 술의 향과 맛이 충격적일 만큼 훌륭했던 까닭입니다. 푹 익은 사과로 잼을 만든 것처럼 향은 진한데 맛이 한없이 깔끔했습니다.

술을 빚어낸 어르신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환한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비싸게 받으면 안 팔린다”면서도 “요즘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우리 술을 알아줘서 참 반갑다”고 또 덧붙이셨습니다. 전통소주를 처음 제대로 맛본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개성, 안동, 제주…‘3대 소주’ 시작점은
서울 서초구 aT센터에서 열린 ‘제2회 대한민국 막걸리 엑스포’ 한 부스에 전통주를 만드는 도구 ‘소줏고리’가 전시돼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지난주 <기술자> 코너에서는 현대적인 방법으로 만드는 ‘희석식 소주’를 소개했습니다. 오늘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드는 술, ‘증류식 소주’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안동소주 등 옛날 술의 이야기입니다.

우선 증류주 제조법은 원나라, 즉 몽골에서 전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의 제25대 왕인 충렬왕(1236~1308)이 재위하던 때 쿠빌라이 칸(칭기즈칸의 손자)이 일본을 정벌하고자 고려를 거쳐 갔는데 이때 몽골군의 주둔지가 있던 지역에서 제조법이 전수됐다고 합니다.

사료(史料)에 따라 구체적인 시기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개성과 안동, 그리고 제주가 그 중심지였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예로부터 개성소주, 안동소주, 제주소주(고도리술)를 우리나라의 ‘3대 소주’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증류식 소주를 빚으려면 우선 좋은 쌀로 고두밥을 지어야 합니다. 밥을 지었다면 바닥에 멍석을 깔고 그 위에 밥을 넓게 펼쳐 열기를 식히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후 누룩가루를 탄 물에 밥을 넣고 잘 섞어 2~3주가량 발효하면 일반 발효주의 밑술 격인 ‘전술’이 됩니다.

이 전술을 가마솥에 얹은 소줏고리에 넣고 고아내면 물보다 끓는 점이 낮은 알코올 등 성분이 소줏고리 위쪽으로 모이게 됩니다. 소줏고리 뚜껑에는 찬물을 담은 그릇을 얹어두는데 증발했던 알코올이 다시 액체, 즉 술이 되어 귀때(귓대)로 흘러나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귀하고 귀했던 술, 사치품·약으로 쓰였다
누룩은 통밀이나 찐 콩 등을 맷돌로 굵직하게 갈아 반죽한 뒤 발효해 만든다. 원료로는 밀이 예로부터 가장 보편적이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증류주 제조법은 여러 나라에서 흔하게 사용됩니다. 사학자 중 일부는 원나라가 페르시아의 회교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증류를 처음 배운 것이라고도 보는데요. 소주를 아라비아어로 ‘아락(Arag)’이라 하는데 개성에서도 ‘아락주’라고 표현하는 게 그 근거라고 합니다.

여담으로 말씀드리면 이같은 이유로 제사상에 청주와 탁주는 올려도 소주는 잘 올리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조 기법이 해외에서 전수됐다는 것이죠. 또 전통 방식으로 빚어낸 소주가 워낙 독해 상에 올리면 후손들의 삶이 지난해지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페르시아에 원나라까지, 그렇다면 전통소주가 전통 술이 아닌가? 꼭 부정적으로만 보실 건 또 아닙니다. 앞에서 ‘누룩’이라는 걸 언급한 적이 있는데요. 이 누룩을 쓰는 게 바로 우리나라만의 소주 제조법입니다. 누룩은 쉽게 말해 술을 빚는 데 쓰는 발효제입니다.

주로 통밀이나 찐 콩 등을 맷돌로 굵직하게 갈아 반죽한 뒤 발효해 누룩을 만듭니다. 원료로는 밀이 예로부터 가장 보편적입니다만, 양조장에 따라 단맛을 내고자 쌀을 쓰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2030 세대의 입맛에 맞춰 쌀누룩을 쓰는 곳이 흔해지는 추세입니다.

사실 전통소주는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도 사치품처럼 여겨졌다고 합니다. 왕이나 사대부가 아니고서야 즐기기 어려웠다고 하는데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문종이 승하한 후 상주였던 단종이 허약해지자 신하들이 소주를 약으로 권했다고 합니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조금씩 대중화되는 듯했으나, 그래도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이 쌀을 수탈하고자 소주를 빚지 못하게 했고, 6·25 전쟁 이후 먹거리가 없었던 1960년대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순곡주 제조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양곡관리법과 순곡주 제조 금지령이 시행된 뒤 전국에서 증류식 소주를 빚던 양조장 300여곳이 문을 닫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88올림픽이 열릴 즈음에야 비로소 전통소주 지원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됐다고 합니다. 본격적인 사업화도 그때부터 이뤄졌습니다.

‘홈술’ 문화에 급부상…2030 지갑 열었다
양조장에 따라 빚어낸 소주를 적게는 며칠, 길게는 몇 년씩 숙성해 판매하기도 한다. 전통 소주를 숙성하면 특유의 화근내(탄내)와 잡내가 잡힌다고 한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탄생한 맥주, 또 고대 중동에서 출발한 와인 등에 비하면 우리 전통소주가 세상의 빛을 본 기간은 짧습니다. 그러나 반가운 건 팬데믹을 계기로 ‘홈술(집에서 마시는 술)’ 문화가 확산하면서 전통주, 특히 전통소주 수요가 급증했다는 점입니다.

22일 외식 프랜차이즈 기업 더본코리아에 따르면 전통주 커뮤니티 ‘백술닷컴’의 올해 증류주 판매량은 작년보다 280% 증가했습니다. 막걸리(37%)와 약주·청주(14%)도 인기였지만, 무엇보다 소주·증류주(40%)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컸다고 합니다.

전통 방식으로 빚어낸 증류식 소주가 인기인 건 고도수 원액을 탄산수와 섞어 마시는 칵테일 ‘하이볼(Highball)’ 열풍 때문으로 풀이됩니다. 하이볼은 최근 2030 사이에서 급부상한 트렌드인데 백술닷컴에서도 올해 2030 세대의 비율이 60%까지 기록했다고 합니다.

소주 등을 빚어내며 전통주 생산에 힘쓰시는 분들도 이같은 분위기를 반기고 있습니다. 전통주 산업 규모(국세청 통계 기준)는 2020년 627억원, 2021년 941억원, 2022년 1629억원 순으로 급성장 중인데 내년에는 그 성장세가 더 대담해질 것이란 전망도 나옵니다.

여러 외국 술에 밀리던 우리 술이 늦게나마 빛을 본 건 참 반가운 일입니다. 연말 송년회 때 위스키, 와인 같은 외국 술도 좋지만, 전통소주 한 잔 나눠보시면 어떨까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전통소주는 알코올 도수가 높은 원액일수록 달큰하고 진하면서도 깔끔한 맛이 납니다.

다음 주에는 피라미드를 지을 때도 즐겼다는 술, 맥주 이야기를 준비해오겠습니다.

<참고문헌 및 자료>

ㅇ한국의 전통명주 2: 양주집, 박록담 외 5인, 코리아쇼케이스, 2005

ㅇ안동소주 생산과 소비의 역사와 의미, 배영동, 역사문화학회, 2006

ㅇ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누가 따라주니 그저 마시기만 했던 술. 그 술을 보고 한 번쯤 ‘이건 어떻게 만들었나’ 궁금했던 적 있으신가요? 매주 금요일, 우리네 일상 속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술 이야기를 전합니다. 술을 기록하는 사람, 기술자(記술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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