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계좌개설·홍콩ELS 사태 후폭풍…핵심성과지표 손질 나선 은행
투자상품 영업 실적 배점 조정
고객수익률 비중 확대 고심
“단기 실적 중심 KPI 지양돼야”
은행권이 승진·성과급 책정의 기준이 되는 핵심성과지표(KPI) 손질에 나섰다. 올해 무리한 실적 압박이 원인이 된 대구은행 ‘불법 증권계좌 개설’ 사고부터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불완전판매 논란 등이 줄줄이 터지자, KPI 개편 필요성이 커진 데 따른 것이다.
22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은행은 KPI에서 투자상품 판매 실적에 대한 배점을 낮추고 고객 수익률 비중을 확대하는 내용의 KPI 개선 작업을 진행 중이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높아진 사회적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고객 중심으로 KPI를 재구성하고 있으며, 올해 말까지 작업을 완료해 내년부터 적용할 계획이다”라며 “특히 투자상품에 대한 항목을 집중적으로 살피고 있으며 개선 방안을 논의 중이다”라고 했다. 이 밖에 시중은행도 소비자 보호에 방점을 두고 KPI를 조정 중이다.
단기 성과 중심의 KPI가 불완전판매, 불건전 영업행위를 유발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자 ‘소비자 보호’와 ‘장기 성과’를 중심으로 KPI 개선에 나선 것으로 해석된다. KPI는 직원들의 성과를 측정하는 일종의 채점표다. 은행 영업의 중심이 되는 대출, 예·적금, 투자상품 판매 실적 등 수십 개 항목을 정한 뒤 항목별 비중에 따라 배점을 달리 적용한다. KPI는 성과급은 물론 승진 등 인사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직원들은 그 해 KPI상 배점이 높게 잡힌 금융상품을 파는 데 주력한다.
문제는 실적 압박이 무리한 영업으로 이어져 고객 피해가 속속 불거지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지난 8월 적발된 대구은행 직원들의 불법 증권계좌 개설 사고 역시 KPI로부터 촉발된 것으로 드러났다. 대구은행은 지난해 영업점 KPI 증권계좌 개설 만점 기준을 고객당 1계좌에서 2계좌로 강화하고 개인 실적에도 이를 중복 반영했다. 이 때문에 56개 지점의 직원 114명이 고객 몰래 증권계좌를 추가 개설하는 등 부당 행위를 저질렀다. 실제로 부당 개설 계좌 1662건 중 90.5%는 KPI가 변경된 시점인 2022년 중에 발생했다.
최근 불거진 홍콩H지수 ELS 불완전판매 논란도 KPI와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통상 시중은행 대부분이 예·적금보다 펀드·ELS 등 투자상품을 팔았을 때 직원에게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한 시중은행의 2022년, 2023년 개인고객부문 KPI를 살펴보면 적립식 예금, 주택청약저축에 부여되는 점수는 최대 0.2점, 0.5점인 반면 투자상품에는 1.0점, 2.0점이 매겨진다. 직원 입장에선 예금 한 계좌를 개설하는 것보다 투자상품을 파는 것이 효율적인 셈이다.
지난 2019년 불거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와 라임자산운용 부실 펀드 사태 때도 단기 영업 실적 중심의 KPI가 원인으로 지목됐다. 예컨대 DLF를 얼마나 팔았는지를 KPI에 포함해 직원을 평가했고, 성과 압박에 몰린 직원이 실적을 올리기 위해 고객 성향을 따지지 않고 DLF 같은 고위험 상품을 판매했다는 것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DLF 사태 때도 단기 실적 위주의 KPI가 문제로 지목됐으나, 은행들은 한두 해 소비자 보호, 리스크 관리 비중을 높인 뒤 영업 강화를 이유로 KPI에 다시 비이자이익을 반영하기 시작했다”며 “KPI는 개별 회사의 경영 전략인 만큼 금융 당국이 적극 개입할 문제는 아니지만, 소비자 중심으로 개편될 수 있도록 엄격한 관리, 감독이 필요해 보인다”고 했다. 실제로 시중은행은 2021년 초 저금리 장기화로 수익성이 악화되자 펀드·ELS 등 파생상품을 판매해 거둬들이는 비이자이익을 KPI에 반영했다.
금융감독원은 내년부터 은행이 KPI에 특정 상품 판매 실적을 연계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금감원은 전날 이런 내용의 ‘은행 내부통제 혁신 개선안’을 발표했다. 또 은행 준법감시, 소비자보호 부서를 중심으로 KPI가 금융사고나 불건전 영업행위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지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개선하도록 했다. 금감원은 내년 4월부터 은행의 KPI 적정성 점검을 시행하기로 했다.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무비자에 급 높인 주한대사, 정상회담까지… 한국에 공들이는 中, 속내는
- 역대급 모금에도 수백억 원 빚… 선거 후폭풍 직면한 해리스
- 금투세 폐지시킨 개미들... “이번엔 민주당 지지해야겠다”는 이유는
- ‘머스크 시대’ 올 것 알았나… 스페이스X에 4000억 베팅한 박현주 선구안
- 4만전자 코 앞인데... “지금이라도 트럼프 리스크 있는 종목 피하라”
- 국산 배터리 심은 벤츠 전기차, 아파트 주차장서 불에 타
- [단독] 신세계, 95年 역사 본점 손본다... 식당가 대대적 리뉴얼
- [그린벨트 해제後]② 베드타운 넘어 자족기능 갖출 수 있을까... 기업유치·교통 등 난제 수두룩
- 홍콩 부동산 침체 가속화?… 호화 주택 내던지는 부자들
- 계열사가 “불매 운동하자”… 성과급에 분열된 현대차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