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 대통령 "300개 규제 철폐"…대규모 시위 벌어졌다
"성장 방해한 억압적 규제 없애겠다"
노동자·좌파 "독재자" 외치며 시위 나서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사진)이 페소화 평가절하에 이어 300여개 규제를 한꺼번에 걷어내는 대개혁 방침을 밝혔다. 빈곤율이 40%를 넘고 물가 상승률이 세 자릿수에 이르는 자국 경제를 되살리겠다는 포부에서 고안된 정책 중 하나다.
밀레이 대통령이 의회 등으로부터 충분한 의견 수렴을 거치지 않고 ‘대수술’에 가까운 정책들을 밀어붙이자 수천 명이 거리로 나와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밀레이 대통령은 지난 20일(현지시간) 오후 9시께 대대적 규제 완화를 골자로 하는 긴급조치를 발표했다.
주택 임대 시장부터 인터넷 서비스, 식품 소매, 와인 생산, 대외 무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있는 300가지 규제를 철폐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임대료 규제법 개정을 통해 임대료 제한을 없애고, 항공, 의료, 제약, 관광 산업을 중심으로 경쟁 촉진을 위한 일련의 규정 변경이 이뤄진다.
공기업 민영화도 포함돼 있다. 대상 기업이 특정되진 않았지만, 밀레이 대통령이 과거 민영화에 찬성한다고 밝혔던 국영 에너지 기업 YPF가 유력하게 거론된다. 노동법 현대화도 주요 추진 과제다. 일자리 창출을 위한 퇴직금 삭감, 신입 사원 수습 기간 연장, 출산 휴가 폐지 등이 포함됐다.
이밖에 청정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핵심 광물로 꼽히는 리튬과 구리 개발 산업에 대한 비용 절감책도 마련됐다.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리튬 산업을 발전시키고 있는 나라로 꼽힌다. 광산 기업에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정부에 신고할 의무를 부과하고 있는, 1990년대에 제정된 오래된 법을 폐지하고 통관 규제도 없애겠다는 방침이다. 이전 정부에서 국내 수요 충족을 위해 시행했던 수출 제한도 전면 금지한다.
밀레이 대통령은 TV 연설에서 “아르헨티나를 쇠퇴하게 만드는 경제 모델을 종식하기 위한 첫걸음”이라며 “우리나라를 무너뜨린 억압적 제도와 법적 틀을 풀어내겠다”고 밝혔다. 그는 “그간 성장을 가로막고 방해했던 막대한 양의 규제를 철폐해 국민들께 자유와 자율성을 돌려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긴급조치는 정부 관보에 게재된 뒤 상·하원 의원들로 구성된 공동 위원회의 평가를 받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목표 시행 시점은 오는 29일이다.
이날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포함한 아르헨티나 주요 도시에선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개혁 정책이 발표되기 몇 시간 전부터 시작된 시위는 밀레이 대통령의 연설 직후부터 불이 붙었다.
시위는 노동자들과 밀레이 대통령이 각을 세워 온 좌파 페론주의(후안 도밍고 페론 전 대통령을 계승한 정치 이념) 지지자들이 주도했다. 이들은 “밀레이는 쓰레기” “밀레이는 독재자” “아르헨티나는 판매 대상이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의회 앞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시위대는 냄비를 두드려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남미 특유의 시위 방식 ‘카세롤라소’에 나섰다.
시위에 참여한 역사학자 카롤라 고메스는 가디언에 “그(밀레이 대통령)는 자신이 로마 황제라고 생각한다”며 “군사 독재 정권도 이런 짓은 하지 않았다. 밀레이는 대처(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보다도 더 나쁘다”고 말했다.
한때 대선 후보이기도 했던 좌파 성향의 미리암 브레그먼 부에노스아이레스 하원의원은 이날 발표된 긴급조치를 “노동자들에 대한 전투 구상”에 비유하며 전국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좌파 정당 파르티도오브레로(Partido Obrero)의 가브리엘 솔라노 대표는 “노동자와 중산층들이 급진적 경제학자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이 실수였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고 했다.
야당 정치인들은 특히 밀레이 대통령이 의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긴급조치라는 꼼수를 단행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집권 자유전진연합이 보유한 의석수는 상원에서 10% 미만, 하원에선 15%에 불과하다. 중도 좌파 성향의 마르가리타 스톨비저 의원은 이번 긴급조치가 “위헌적이며 권한을 남용하고 있다”며 “의회의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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