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찐리뷰] 나이 50에 美 첩보국 최초 한인 공작원 활동…유한양행 회장님의 비밀
[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1일 방송된 'Only one - 요원 A의 비밀'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가수 최예나, 배우 이병준, 래퍼 겸 음악프로듀서 라이머가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수상한 외지인들
먼저, 오늘의 이야기 주인공을 할아버지로 둔 손녀딸 일링 씨의 이야기부터 들어볼게. 할아버지와 각별한 사이였는데, 할아버지한테 이런 엄청난 비밀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대.
"할아버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슈퍼 히어로'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이 되는 게, 할아버지가 가족과 떨어져 지낸 적이 많긴 했지만 특히 그 해는 떨어져 지낸 것뿐만 아니라 가족들과 자주 연락할 수 없었습니다. 그 '프로젝트'에 합류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죠. 왜 그걸 하셨을까 묻는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할아버지는 자신의 목숨은 별로 중요하다 생각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오히려 진정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기회로 보셨다고 생각합니다."
-손녀 유일링
할아버지에게 어떤 비밀이 있었다는 걸까. 그 모든 비밀은 바로 이 '탑 시크릿'이라 적힌 문서에 적혀있어. 할아버지는 어떤 '프로젝트'에 참여했길래, 그 내용이 담긴 문서는 '탑 시크릿'인 걸까.
때는, 1945년 8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연안에 있는 외딴섬 산타 카탈리나. 지금은 휴양지로 유명하지만, 이때만 해도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았어. 그런데 조용한 이 섬에, 얼마 전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해. 섬 곳곳에서 짐승들의 사체가 발견된 거야. 어느 날에는 목이 잘린 짐승 사체가 무더기로 나왔어. 섬 주민들은 이 모든 게 얼마 전 이 섬에 들어온 외지인들의 짓이라 생각했어. 그들이 들어온 후, 섬에서는 총소리, 폭탄소리가 끊이질 않았어. 짐승들의 사체도 그들의 소행이야. 그리고 섬 해변에서는 이런 게 목격돼.
소형 잠수정이야. 그 외지인들은 한 번씩 이걸 타고 나갔다가 며칠이 지나 돌아오곤 했어. 처음엔 그 사람들이 미군인가 싶었어. 인근 섬에 군사 기지가 많았거든. 그런데 좀 수상해. 부대 마크, 계급장 같은 게 없어. 한마디로, 정식 부대가 아닌 거야. 그리고 결정적으로, 생김새가 낯설어.
전부 검은 머리의 동양인이야. 그것도 조선에서 온 사람들. 이들은 대체 이 섬에서 뭘 하는 걸까? 이들의 정체가 세상에 알려진 건, 무려 50년 후인 1993년이야. 바로 그 '탑 시크릿' 보고서가 세상에 공개된 후야. 그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어.
"B는 평양 출신으로 체육을 전공했으며, 이후 미국 비행사 양성소에 들어가 조종 기술을 익혔다."
"F는 일본 항해 학교를 졸업한 항해사로 일본어에 능통할 뿐 아니라 미국 하버드 대학을 졸업해 영어 실력도 뛰어나다."
"G는 금속 화학기술자로 비행기 제조회사에서 일했으며 지질학, 물리화학 기술 방면으로 뛰어나다."
보고서에는 사람들의 이름이 알파벳 암호명으로 표시돼 있어. 알파벳 순서상 첫 번째인 'A'. 암호명 'A' 인물에 관한 설명은 이렇게 쓰여있어.
"A는 50세이며, 그는 자신의 사업체 직원들을 모두 투철한 한인 애국자들로 선발했다. 회사의 존망을 무릅쓰고 그의 사업체를 작전에 이용하는데 기꺼이 동의했다."
암호명 A의 정체. 그가 바로 유일링 씨의 할아버지야. 바로, 이 사람.
이런 엘리트들이 왜 미국의 외딴섬에 모였을까. 사실 이들에게도 소속이 있어. 바로 '탑 시크릿' 보고서의 진짜 이름은 이거야.
"NAPKO PROJECT(냅코 프로젝트) OF OSS"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정보기관이야. 우리가 잘 아는 CIA의 전신이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공식 참전한 미국은, OSS에 한반도 비밀 침투 작전을 지시해.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전에, 한반도에 있는 일본군을 무력화시키겠다는 거야. 워싱턴 OSS 본부에서는 수중 작전을 계획했어. 아까 그 소형 잠수정 기억나지? 바다로 잠수함을 통해 한반도에 침투하는 작전이야. 이 작전이 바로 '냅코 프로젝트'야.
산타 카탈리나 섬의 외지인들은 냅코 프로젝트에 동원된 조선인 공작원들이었어. 미국 첩보국 최초의 한인 요원들이야.
▲ 냅코 프로젝트의 요원 A
근데 왜, 미국인이 아닌 조선인으로 꾸려졌을까? 냅코 프로젝트는 요원 70%가 사망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을 정도로, 위험한 프로젝트였어. 그래서 조선인들을 작전에 투입하기로 한 거야.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 걸고 싸울 테니까. 냅코 프로젝트는 극비 프로젝트라 공작원 모집도 비밀리에 진행됐어.
먼저 OSS 모집팀이 향한 곳은 미국 중북부에 위치한 포로 수용소였어. 이곳에는 태평양 전쟁 중에 잡혀온 포로들이 있어. OSS 모집팀의 요원 한 명이 수용소 소장을 만나 이걸 내밀었어.
"이름 이종흥 -일본군이 아니라는 이유로 포로복 착용을 거부했을 정도로 반일적. 평양과 서울 지형을 잘 알고 있는 인물."
"이름 김현일 -황해도 출신의 농부로 지형을 잘 알며 미혼."
"이름 김필영 -황해도 송화군 출생으로 구월산 지리를 잘 알고 반일적."
수용소에 수감된 포로들의 신상이 적힌 개인기록 카드야. 하나같이 한반도 지형을 잘 아는 반일적인 인물들이야. 당시 수용소에는 일본군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이 많았어. 일본군 신분으로 싸우다가 포로까지 됐으니, 반일감정이 극에 달했겠지. 게다가 이미 군사훈련까지 받은 병사들이야. OSS 입장에서는 공작원으로 더할 나위가 없지.
그리고 OSS 모집팀이 향한 또 한 곳, 이번에는 LA 한인타운 인근의 호텔이야. 동양인 남성이 301호로 들어가. 잠시 후, 웬 남자들이 302호로 조용히 들어가. 그리고 헤드폰을 쓴 채 뭔가를 받아 적기 시작해. 301호에 들어간 남자를 도청하는 거야. 302호의 정체는, OSS 모집팀이야. 냅코 프로젝트의 공작원을 뽑기 위해, 재미 한인들을 미행하고 도청한 거야. 그리고 철저한 검증을 통과한 사람들만 접촉해. 이들이 만난 재미 한인들은 대부분 좋은 학벌에 좋은 직장,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야. 이들이 그 모든 걸 버리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냅코 프로젝트 작전에 참여할까?
"만나보는데 흔쾌히 승낙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승낙을 안 하는 이유는 그저 미국 생활이 뭣하고 그런데 한국은 어련히 가려니 하고 자기 생명은 아끼는 셈이죠."
-장석윤, 당시 OSS 한인 요원
쉽게 정할 수 없는 결정. 이틀 뒤, 한 사람한테 연락이 왔어. "프로젝트에 참여하겠다. 필요하다면 조선에 있는 제 회사를 사용해도 좋다"는 이 사람. 바로 일링의 할아버지, 요원 A야.
요원 A는 재미한인들 중 가장 먼저 프로젝트에 참여했어. 근데 요원 A의 나이는 50세야. 실전에 투입되기 너무 고령이지. 그래서 실전 투입이 아닌 고문 역할을 담당하기로 했어. 그의 회사 지점이 조선 전역에 있었는데, 그곳의 직원과 시설을 비밀조직으로 활용해도 좋대.
그 뒤로, 다른 한인들에게도 연락이 왔어. "아무래도 가족들이 위험할 것 같으니, 위장 이혼을 하고 참여하겠다"는 사람, "난 미간에 큰 사마귀가 있어 쉽게 눈에 띌 거다. 성형수술을 하고 참여하겠다"는 사람. 그렇게 요원A를 시작으로, 8명의 한인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겠대. 행여 피해가 갈까, 가족들에게는 철저히 숨겼어.
1945년 5월, 미국 각지에서 19명의 요원들이 산타 카탈리나 섬에 모였어. 명문대를 졸업한 기술자부터 포로 수용소에서 차출된 사람까지, 그야말로 지옥의 외인구단이야. 그런데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어. 19명 중에 20대는 단 3명, 대부분 30, 40대였어. 게다가 절반은, 미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민간인이야. 군사 훈련은커녕, 총 쏘는 법도 잘 몰라. 심지어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3개월이야. 그 시간 안에, 미군 특수부대 수준의 인간병기가 되어야 해.
요원들은 침투 작전에 필요한 A부터 Z까지 모든 걸 배우기 시작해. 첫 번째로 사격. 처음에는 총알을 과녁에 맞히는 것조차 불가능했어. 그런데 매일 사격훈련을 한 결과, 움직이는 멧돼지도 단번에 맞추는 실력을 갖췄어. 두 번째로 무선통신. 빠른 암호 송신과 해독 능력이 필요해. 피나는 훈련 끝에 웬만한 미군들보다 2배 이상 빨랐대.
세 번째, 생존훈련. 바다 한가운데서 고무보트를 조립해 나오는 전투 수영 훈련, 선인장 군락 위에 착지하는 낙하산 훈련까지. 매일 지옥훈련이 이어졌어. 나라를 위한 마음으로 훈련에 임한 요원들. 이 지옥훈련을 받는 요원들 중 뜻밖의 얼굴이 있어. 바로 요원 A야.
분명 요원 A는 고령이라, 실전이 아닌 고문 역할을 하기로 했는데. 다른 요원들과 함께 훈련을 받은 거야. 그 이유는 뭘까.
"할아버지는 그 프로젝트를 위한 완벽한 리더 요원이었어요. 그리고 어렸을 때 네브래스카에서 한인 청년 군인들과 함께 훈련받은 적이 있어요. 냅코 프로젝트에 필요한 총기와 도구를 사용하는 데 능숙할 수 있었죠."
-유일링, 요원 A의 손녀
요원 A는 14살에 군사학교에 입학해서 3년간 미육군사관학교와 똑같은 훈련을 받았어. 성인이 된 후에는 미국에 있는 한일 청년들을 모아서 항일 민병대를 조직했어. 리더로서 완벽한 조건을 갖췄지. 그는 팀의 조장까지 맡으며 요원들을 이끌었대.
근데 이 요원 A의 얼굴, 어디서 본 적 없어? 암호명 A의 진짜 정체는, 대한민국 기업 총수 중에 전무후무한 이력을 가진 '유일한 회장'이야.
요즘 세대에겐 생소한 이름인지 모르지만, 이 버드나무 그림의 로고로 유명한 '유한양행'은 알지? 매출액 약 1조 8천억 원의 국내 유명 제약회사. 이 회사의 창업주 유일한이 바로, 냅코 프로젝트의 요원 A야.
▲ 천재 사업가 유일한
때는 1895년, 유일한은 청일전쟁이 한창일 때 태어났어. 아버지가 평양에서 장사를 했는데, 당시 세계적인 재봉틀 브랜드의 대리점을 운영하며 큰돈을 벌었어. 그런데 1904년, 한반도에 또다시 전운이 감돌았어. 유일한의 아버지는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기로 결심해. 더 넓은 세계로 가서 나라에 보탬되는 사람이 되라고. 당시 유일한의 나이 9살이었어.
그렇게 미국에 간 유일한은 25세가 되던 해, 에디슨이 설립한 글로벌 기업에 입사해. 당시 전기가 들어가는 제품은 전부 이 회사가 만들었다고 봐도 돼. 유일한은 이 회사에서 최초의 동양인 회계사로 뽑혀 일했어. 그러던 어느 날, 유일한이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겠대. 회사에서 아시아 시장 총책임자 자리도 제안했는데, 그것도 거절해.
그렇게 대기업을 퇴사한 유일한은 작은 사업을 시작했어. 그가 시작한 사업 아이템은, 지금까지 했던 일과는 전혀 다른 '숙주나물'이었어. 당시 숙주나물은 인기 음식이었던 만두에 꼭 들어가야만 하는 필수 식재료였어. 유일한은 금방 상해버리는 숙주나물을 어떻게 오래 보관해 유통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 그러다 그가 생각해 낸 방법은 바로 '통조림'이야. 통조림을 활용해 숙주나물을 훨씬 오래 보관할 수 있게 만들었어.
근데 이름 없는 작은 회사다 보니, 홍보가 쉽지 않아. 게다가 통조림을 싣고 가던 트럭이 교통사고까지 났어. 도로에 수백 개의 통조림이 나뒹굴고, 일대 교통이 마비됐어. 지역 신문기자까지 와서 사고 현장을 찍을 정도였어. 유일한은 이걸 기회라고 생각했어. 곧바로 기자와 인터뷰를 진행했어. 이후, 통조림 주문이 폭주해. 숙주나물 통조림 트럭이 교통사고가 나서 한때 교통이 마비됐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는데, 기사 내용에 통조림으로 숙주나물을 장기 보관 할 수 있다는 내용이 언급되며 홍보가 된 거야.
이 일을 계기로 사업은 번창해. 회사를 설립한 지 6년 만에 자산이 당시 2백만불. 지금 돈으로 약 250억 원을 번 거야. 주문량이 급증하며 유일한은 좋은 녹두를 구하기 위해 중국과 조선을 방문하기로 했어. 1926년, 그렇게 유일한은 21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어.
그런데 기대와 설렘도 잠시, 조국에 도착한 유일한은 경악을 금치 못했어.
"전 조선에 결핵환자 작년 중 만천구백여"
"폐결핵과 기타 결핵 환자는 조선인 8,238명 그중 사망한 자는 3,102명."
20세기 최악의 재앙이라 불리는 '스페인 독감'. 1918년에 처음 발생해 2년 동안 전 세계 약 5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범유행 전염병이야. 그 스페인 독감이 한반도를 덮쳤어. 4달 만에 760만 명이 감염되고 14만 명이 사망했어. 게다가 기생충, 결핵, 피부병, 성병 등 제때 약만 먹으면 고칠 수 있는 병인데도 죽는 사람이 허다한 거야. 이런 한반도의 상황을 보고 충격을 받은 유일한은 이렇게 생각했어.
"미국의 값싸고 좋은 약을 우리나라로 가져오자"
잘 나가는 미국 회사를 접고 조선에서 의약품 사업을 하겠다는 거야. 이 말을 들은 미국 동료들은 유일한을 말렸어. 그런 동료들에게 유일한은 "건강한 국민만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했어. 어린 나이에 조선을 떠났지만, 한시도 조국을 잊은 적이 없대. 유일한은 자신의 모든 지분을 정리하고, 조선에 시급한 의약품을 구입하는데 전부 투자했어.
그렇게 귀국길에 오른 유일한에게 응원을 보낸 한 사람이 있어. 바로 독립운동가 서재필 선생. 유일한이 미국에 있는 동안 정신적 지주 같은 분이었대.
서재필 선생은 떠나는 그에게 그림 하나를 선물해. 바로 이 버드나무 그림.
유일한의 유 씨가 '버들 유(柳)'였거든. 조선사람들에게 버드나무 그늘 같은 존재가 되라는 의미였대. 유일한은 이 그림을 회사의 상징으로 삼고, 종로에 사무실을 개업해. 그 회사가 바로 '유한양행'. 미국에서 온 31살의 천재 사업가의 도전은 이렇게 시작됐어.
▲ 쪽박 사업이 대박으로, 굽히지 않은 신념
그런데 그렇게 시작한 의약품 사업이 처음에는 완전 쪽박이었어. 약을 사겠다는 사람이 없어.
"많은 시간이 지나고 1926년에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도 할아버지는 또 아웃사이더였습니다. 남들과 다르게 미국식 옷을 입고, 다르게 움직이고, 다르게 행동했을 거예요. 언어도 달랐겠죠. 당시 할아버지의 한국어 실력은 일반 30대 남성의 한국어가 아니었을 거예요. 그래서 항상 아웃사이더였어요."
-유일링, 유일한의 손녀
조국을 위해 모든 걸 걸었지만, 현실은 '검은 머리 이방인'이었어. 게다가 이 때는 일제강점기 시절이야. 일본 제약회사들이 국내 의약품 시장을 꽉 잡고 있어. 유통되는 건 대부분 일제 의약품이야. 근데 미국에서도 성공한 천재 사업가가, 여기서 포기했겠어? 짐을 싸서 약을 들고 길을 나선 유일한. 그가 향한 곳은, 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이야. 그들이라면 미국 의약품에 관심을 가질지도 몰라. 유일한은 직접 차를 몰며 전국을 돌았어.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은, 당나귀에 약을 싣고 들어갔대. 그 결과, 주문 전화가 폭주해. 조선 내 외국인을 공략하자는 유일한의 전략이 먹힌 거야.
다음 타깃은 일반 소비자야. 그들에게 회사를 알리기 위해, '광고'를 신문에 싣기로 했어. 일단 일본 제약사들이 어떤 광고를 하는지, 시장 분석을 했어. 그런데 일본 광고들이 아주 기가 막혀.
당시 실제 일본 의약품 광고야. 구토, 현기증, 멀미, 우울증, 심지어 각종 전염병에도 효과가 있대. 이 약의 정체는, 소화제야. 단순 소화제를 만병통치약처럼 홍보한 거야. 이렇게 당시 일제의 의약품은 과대광고가 빈번했어. 그럼 유일한은 어떻게 했을까?
유한양행은 버드나무 그림만 달랑 그려 넣고 '개업'이라 적었어. 과감하게 티저 광고를 내며, 제품이 아닌 브랜드를 홍보한 거야. 결과는 대성공. 기업 이미지를 강조한 광고 덕에, 회사 이미지도 수직상승했어.
유일한은 그 후 자체 공장을 설립하고 제품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어. 그중 하나가 자양강장제 개발이야. 근데 당시 자양강장제도 일본 제품의 인기가 높았어. 유난히 약발이 좋았거든. 그런데 일본 자양강장제가 약발이 좋았던 이유는 따로 있어. 아편, 모르핀 등의 마약 성분을 넣었기 때문이야. 자양강장제에 마약이라니,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짓이지.
유한양행 직원들 중에는 '우리도 일본과 비슷한 자양강장제 제품을 만들자'고 하는 사람도 있었어. 유일한 회장은 그런 직원들을 엄하게 혼냈어. '건강한 국민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는 유일한인데, 약에 마약을 넣는다? 절대 용납할 수 없지. 그렇게 마약성분 없는 자양강장제 '네오톤토닉'이 출시됐어.
마약성분 없는 자양강장제라는 입소문이 퍼지며, 만주에서도 주문이 빗발쳐. 시장에는 유사품이 넘쳐날 정도였어. 미국에서 온 천재 장사꾼이 마침내 일본 제약사를 누르고, 업계 탑을 차지했어.
▲ 냅코 프로젝트의 폐기
그 후 유 회장은 해외로 눈을 돌려, 해외수출 계약을 위해 직접 미국으로 날아갔어. 그런데 뜻밖의 제안을 받아. 바로 '냅코 프로젝트'에 참여해 달라는 OSS의 제안이야. 해외 진출을 앞두고 중요한 계약이 줄줄이 남아있는데, 그런 시기에 그 회사의 회장님이 자리를 비운다? 게다가 미국에는 가족들도 함께 와있어. 당시 딸이 16살, 아들은 10살이야. 어린 자녀들을 남겨둔 채 죽을 수도 있어. 이런 상황인데도, 유일한 회장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거야. 조국을 위한 일이니까.
1945년 8월. 냅코 프로젝트의 작전 개시가 임박했어. 3개월간 고된 훈련을 마친 유일한과 요원들은 D-DAY가 잡히길 기다렸어. 그리고 마침내, 상부의 연락이 왔어. 그런데, 작전 개시 명령이 아닌, "일본이 항복을 선언했다"는 내용이었어.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정부가 항복을 선언했어. 4년간 이어진 태평양전쟁이 갑자기 종결됐어. 이 소식을 들은 유일한과 요원들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어. 일본의 패망은 곧, 냅코 프로젝트의 폐기를 의미해. 이들이 목숨을 걸고 미국의 비밀작전에 참여했던 건, 이 전쟁에 조선인의 참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래야 전쟁이 끝나고 독립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주권을 주장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일본으로부터는 해방됐지만, 주권을 찾지 못했지. 독립 정부 대신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들어왔고, 끝내 분단의 비극으로 이어졌어.
그렇게 역사에서 묻힌 냅코 프로젝트. 냅코 프로젝트가 실행됐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몰라.
▲ 정권과의 악연
1948년 8월 15일. 한반도 남쪽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어. 유일한도 귀국 준비를 서둘러. 그런데 입국이 불가능해. 한국 정부에서 입국을 거절한 거야. 사실 유일한은 얼마 전 한 통의 편지를 받았어. 발신인은 이승만 대통령이야.
편지는 유 회장에게 초대 상공부 장관을 맡아달라는 내용이었어. 유 회장은 이 편지에 "한국말도 서툰 제가 어떻게 한국 국민을 이끌겠습니까. 전 그저 사업가일 뿐입니다"라며 정중히 거절했어. 이 일로 유일한은 미운털이 박힌 건지 계속 입국 거부를 당하다가 무려 7년 뒤에나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대.
그런데 돌아와 보니, 회사 꼴이 말이 아니야. 이번엔 한국전쟁으로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됐거든. 게다가 휴전이 되면서, 중국과 이북 쪽에 있던 회사 재산을 전부 잃었어. 그게 무려 기업 자산의 80%였어. 회사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선 또 다른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이야.
유 회장이 선택한 한국전쟁 후 새로운 사업 아이템, 자동차 사업이야. 전쟁 피해가 복구되고 나면, 한국도 미국처럼 자동차 시대가 열릴 거라 생각한 거야. 그래서 미국산 자동차 수입 회사를 설립해. 반응은 좋았어.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국회에 고급 승용차를 납품했어. 이제 좀 살았구나, 안심하려던 무렵, '그곳'에서 또 연락이 왔어.
"유한양행은 3억환 정도 내면 되겠소."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악의 선거로 꼽히는 3.15 부정선거. 이승만 정부와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은 깡패들을 동원해서 상대 후보를 방해하고 고무신, 막걸리, 돈봉투로 표를 사다시피 했어. 그러니 부정선거에 돈이 필요하지. 훗날 알려진 바로는, 56개 기업체로부터 63억 환 정도를 받았대. 지금으로 따지면 약 415억원 정도야.
유 회장은 이 요구를 거절했어. 그런데 얼마 후, 자동차 회사에 다급한 전갈이 도착해. 수입한 물건들이 전부 세관에 묶여 있다는 거야. 정부에서 갑자기 자동차와 부속품 수입을 금지했어. 유 회장은 결국 10만 달러 이상의 피해액을 떠안았고, 자동차 사업은 폐업했어.
그런데 정권과의 악연은 이게 끝이 아니야. 박정희 정권 때도 정치자금을 또 요구받아. 한번 크게 손해 본 적 있는 유 회장. 이번에는 어떻게 했을까? 역시나 거절이야. 당연히 박정희 정권도 가만히 있지 않았어. 당시 기업들이 가장 무서워했다는 세무조사. 특별사찰반 24명이 한 달 동안 유한양행 장부를 탈탈 털었어. 근데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이상이 없어. 너무 깨끗해. 하다 하다 안되니까 판매 중인 약품 전체를 과학기술처로 보내서 함량 및 제품 조사까지 실시했어. 그렇게 탈탈 턴 결과, 유 회장은 오히려 상을 받았어.
"두 번째 세금의 날을 맞아 서울 시민 회관에서는 기념식이 있었습니다. 이날 세금을 제때 많이 낸 사람들에게는 그 공덕을 치하하는 훈장과 표창장 등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날 동탑산업훈장을 받은 유일한 씨의 경우를 보면 각종 의약품을 생산해서 국민 보건에 이바지한 것 외에 세금 납부에 모범을 보여 국가산업 신장에 크게 도움을 준 바 있어 영예 최고 훈장을 받게 된 것입니다."
-당시 뉴스 中
과학기술처에 보낸 약품 모두, 함량 미달은 없었어. 이 세무조사로 유 회장은 처벌은커녕, 업계 최초로 동탑산업훈장을 받아. 거기에 국세청 홍보모델까지 됐어. 유 회장은 항상 "회사의 주인은 개인이 아니다. 그 회사를 키워준 사회다"라고 말했어. 그에게 세금은 기업이 마땅히 사회에 돌려줘야 할 돈이었던 거야.
▲ 유일한다웠던, 은퇴 후 행보
세월이 흘러 유 회장도 백발의 일흔 노인이 됐어. 임원들은 슬슬 후계 문제를 걱정했어. 그러면서 후계자로 이 사람이 거론돼.
유 회장의 아들 유일선. 아들은 당시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이었어. 근데 유 회장은 못마땅해하는 눈치야. 변호사가 무슨 사업을 이끄냐며, 말도 안 된대. 그런데도 임원들이 계속 매달리니, 한 가지 조건을 달았어. 아들에게 부사장 직을 맡기고, 경영 능력을 테스트해보기로 한 거야.
그런데 출근 첫날, 아들을 본 직원들은 깜짝 놀랐어. 부사장이 반바지 차림으로 출근한 거야. 게다가 미국에서 자라서 한국말도 서툴러. 그래서 비서도 백인으로 뽑고, 자신에게 오는 서류도 모두 영문으로 번역해 달라 했어. 근데 이 미국스타일이 도움이 되기도 했어. 당시 국내 기업 최초로 컴퓨터를 도입하고, 전자 자료처리실도 만들었어. 그리고 미국에서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화장지를 쓴다며, 화장지 사업을 제안했어.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물자가 귀할 때라, 신문지나 달력으로 뒤처리하던 시절이야. 근데 화장지라니. 그건 사치품이라고 다들 말렸어. 하지만 결과는, 대성공. 이 정도 사업수완이면 아버지 유 회장이 아들을 인정해 줬을까?
그렇게 3년 후인 1969년 10월 30일. 정기주주총회에 참석한 유 회장은 모든 자리에서 물러났어. 그리고 차기 회장한테 자신이 받은 동탑산업훈장을 물려줬어.
차기 회장은 아들이 아니었어. 3년간 부사장으로 일한 아들 대신, 당시 전무에게 사장직을 넘겼어. 그러면서 아들뿐만 아니라 회사 내에 몇 안 되는 친인척도 고심 끝에 전부 해고했어.
"이 조직 속에 우리 친척이 있으면 자네들이 그렇게 안 하려고 해도 주위에서 '장손자의 아들이다, 조카다', 그러면서 파벌이 형성되면 회사 발전에 지장을 받으니까 안된다고… '내가 살아있을 동안 일가친척들 다 내보내야 해' 그래서 조카고 뭐고, 다 내보냈어요. '내가 죽은 다음에 회사가 우리 가족 중에 우수한 사람이 있어서 회사에 플러스가 된다고 해서 채용하는 건 내가 아무 말 안 한다'…"
-연만희, 당시 유한양행 고문
'총수 일가', '재벌 2세', 이런 말 많이 들어봤지? 지금이나 그때나 경영권 대물림은 흔한 일이었어. 근데 유일한은 전문 경영인 제도를 선택한 거야. 국내 기업 최초로. 유일한은 최고 경영자의 임기도 제한했어. 한 번에 3년씩, 최대 한 번만 연임할 수 있도록. 본인이 사망한 후에도 회사가 누군가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야.
유일한은 은퇴 후에도 한국에 남았어. 아내와 아들은 미국으로 떠나고, 출가한 딸과 여동생이 가끔 찾아오는 정도였대. 하지만 외롭지 않았어. 은퇴 후 유일한 회장은 이곳에 가는 걸 좋아했대.
유한공업고등학교. 유일한이 사비를 들여 세운 학교야. 한국전쟁 후 유일한이 결심한 게 있었거든.
"한국 와서 보니까 참 제일 불쌍한 것이 한국 청년들이에요. 왜인고 하니,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변변치 못하고. 또 고등학교라든지 그런데 가면 또 비용이 많아서, 머리는 좋지만 해도 여유가 없어서 못 가는 사람도 많고…"
-유일한
그의 결심은, 조국에 학교를 세우는 일이었어. 한국전쟁 후에 폐허가 된 나라를 복구하는 데는 전문 기술자 육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야. 그 덕에 이 학교의 학생들은 돈 걱정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대. 전교생 전액 장학금이 지원됐어.
"전국에서 온 우수한 학생들이 한 11대 1 정도 되고 공부는 잘하지만 지금 살기 힘들었던 학생들을 모집해서 전액 장학생, 전원 장학생으로 키운 것이 우리들한테는 아주 큰 은인이고 롤모델이 된 것 같아요."
-조성갑, 유한공고 3회 졸업생
유일한은 학교를 세우기만 했을 뿐, 운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어. 공식적으로 학교를 방문한 것도 딱 한 번뿐이야. 그 외엔 멀리서 학생들 공부하는 것만 보고 갔대. 그럼에도 그는 학생들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어.
"전 몇 번 갔거든요. 유일한 박사님 집을. 형광등이 끊어졌다든지 전구 콘센트가 고장 나면 저희도 공구는 있으니까. 그러면 일부러 불러서 저희한테 고쳐달라고 하시는데, 사실은 일을 시키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니라, '밥 먹고 가라. 너희들 밥 먹고 가라' 과일도 주고 특히 달걀도 포함해서 사실 저 같은 경우는 이게 황금, 정말 맛있는 음식이죠. 옛날에는 밥을 제대로 먹느냐 마느냐 하던 시기였으니까."
-조우장, 유한공고 2회 졸업생
1971년 3월. 노환으로 입원 생활을 하던 유일한은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런 부탁을 하셨대.
"내 묘소와 주변 땅을 유한동산으로 꾸며주길 바란다. 단 유한동산에는 절대 울타리를 치지 말고,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해 다오. 어린 학생들의 티 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느끼고 싶다."
유일한의 마지막 바람은, 그가 세운 학교에 잠드는 것이었어.
▲ 회장님의 유언
그 후 온 국민의 관심은, 회장님의 유언장에 집중됐어. 당시 언론은, 유일한이 기업활동을 하며 번 재산이 최소 50억 원에 달할 거라 계산했어. 현재 가치로 약 1,070억 원이야.
가족들이 둘러앉은 채, 유언장이 낭독됐어. 유언장에는 그의 아내, 아들과 딸, 그리고 손녀 이름이 언급됐어. 회장님은 이 재산을 어떻게 나눠 갖길 바라셨을까.
"손녀인 유일링에게 대학 졸업 시까지 학자금 1만 달러를 준다."
"내 소유 주식 14만 941주는 전부 '한국 사회 및 교육 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한다."
"아내 호미리는 재라(딸)가 그 노후를 잘 돌보아 주길 바란다."
"아들 유일선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손녀의 대학 자금을 제외하고, 모두 공익 재단에 기부했어.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할아버지의 유언장이 낭독될 때 가족 중에 누구도 놀란 사람은 없었어요. 사실 저는 그전까지 매번 들어왔던 말이 있는데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넌 아무것도 받지 않을 거야, 그런 건 우리 가족 스타일이 아니야' 그래서 대학 등록금으로 1만 달러를 받았을 때 놀랐어요. 아무것도 안 받는 게 제 가족 스타일이었으니까요. 우리 가족에게 내려오는 한 가지 가르침은 무엇을 얻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일링, 유일한 손녀
이 유언장으로 공익 재단은 유한양행의 최대 주주가 됐어. 경영은 전문 경영인에게, 소유권은 공익 재단에게. 기업의 경영권과 소유권을 완벽히 분리한 거야. 이게 왜 대단한 일이냐면, 유한양행의 주가가 오르면 공익 재단은 그 주식으로 수익을 얻고, 따로 기부하지 않아도 사회에 이익을 환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든 거야. 이런 시스템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어.
오로지 나라를 위한 그의 발자취.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이야기. 우리의 역사 안에서 시대를 이겨낸 사업가. 그는 떠났지만, 그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유한공고 졸업생들은 후배를 위해 기부하며 든든한 선배가 되어주고 있고, 유한양행 출신들도 늘 남을 위했던 유일한의 따뜻한 철학을 본받아 또 다른 나눔을 실천하고 있어. 유일한 손녀 일링 씨는 유일한 정신을 이어갈 연구재단을 설립했어.
"할아버지가 여전히 우리 안에 조금씩 살아계시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할아버지의 정신이 가족들에게 영감이 되기 때문에요. 확실히 할아버지는 나의 영웅이었습니다. 지금도 나의 영웅입니다."
-유일링, 유일한 손녀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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