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비대위’는 권력 이동의 신호탄?…딜레마에 빠진 ‘용산’
2012년 총선 앞두고 벌어진 ‘이명박 대통령-박근혜 비대위원장’ 권력 이동 데자뷔
(시사저널=이원석 기자)
윤석열 정부의 황태자'가 화려한 정계 데뷔전을 갖는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12월21일 비상대책위원장에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추대했다. 한 장관은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한 직후 바로 장관 이임식을 가졌다. 이로써 한동훈 전 장관은 정치 입문과 동시에 집권여당의 최고위직에 올라 100일가량 앞으로 다가온 총선 지휘의 막중한 책무를 맡게 됐다. 일단 정가의 신데렐라로 부르는 데 주저할 이유는 없지만 언제 재투성이 현실에 처박힐지 모른다는 관측도 적지 않다.
"정치 경험 부족? 처음엔 다 길 아니었다"
여권 주류를 중심으로 기대감이 퍼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동시에 내부로부터 이유 있는 우려도 적지 않게 나온다. 수직적 당정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내년 총선이 불리한 구도로 가게 되는데, 윤석열 대통령의 최측근 중 최측근인 한 전 장관이 과연 '윤심(尹心·윤석열 대통령 의중)'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냐는 것이다. 윤 대통령이 30%대 지지율 답보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 못하면 당은 물론 한 전 장관 자신의 정치적 입지도 장담하기 어렵다는 관측이다.
다만 한 전 장관이 방울을 다는 데 성공할 경우 국민의힘은 정부 심판론 구도에서 벗어나 총선 판세에서 비교우위를 점할 가능성도 있다. 무엇보다 한동훈의 등장은 집권 세력 내 조기 '권력 이동'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여권뿐만 아니라 야권의 시선도 집중되고 있다.
한 전 장관은 전임 김기현 대표가 '주류 희생론' 압박 속에 대표직에서 물러난 지 8일 만에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했다. 김 대표 사퇴 이후 윤재옥 원내대표가 이끄는 지도부는 즉각 비대위 체제로의 전환을 결정한 후 위원장 선임 작업에 돌입했다. 당 중진, 원내·외 당협위원장, 원로 등과 만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당초 한 전 장관 외에도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유력 후보군으로 거론됐다. 그러나 당 주류인 친윤(親윤석열)계가 적극적으로 한동훈 추대론을 밀면서 급격히 무게추가 기울었다.
결국 친윤계 입장이 관철되는 수순이었으나 반대 의견도 적지 않았다. 한동훈 비대위에 대한 여권 내 찬반 여론은 6대 4 정도로 팽팽하게 갈리는 분위기였다. 12월18일 200명가량의 당 주요 인사가 모인 원내·외 당협위원장 연석회의에서도 찬반 여론이 그 정도로 나뉘었다. 찬성파는 한 전 장관의 정치적 입지를 앞세웠다. 여러 여론조사의 여권 내 대권주자 지지율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한 전 장관이 아니면 누가 지금 절체절명의 비상 상황에서 당을 이끌 수 있겠냐는 것이다.
여당 핵심 관계자는 시사저널에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는 한 장관 외에 다른 어떤 대안이 있겠는가"라며 "대중이 항상 옳은 건 아니지만 당이 위기에 처한 지금은 대중이 원하는 사람이 나와줄 때"라고 강조했다. 12월20일 당 지도부와 만난 유흥수 상임고문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에 등판했다. 그때 배 12척이 남았는데도 그걸 이끌고 승리했다"며 "지금 우리 당 상황이 배 12척 남은 상황과 같다. 그런 식으로 등판해 승리로 이끌어 나가야지, 선거에서 진 다음에는 아껴서 무엇하냐. 아무 소용도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반대하는 의견들은 한 전 장관이 윤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점에서 독립적인 당 운영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론, 그리고 한 전 장관의 정치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대중적 지지도를 갖고 있더라도 당 운영의 전권을 쥐는 비대위원장을 맡기엔 직접적인 정치 경험이 전무해 아직 역부족 아니냐는 것이다. 특히 이번 비대위원장직은 총선 지휘라는 중대한 역할이 부여되는 만큼 한 전 장관은 감독보다는 선수로 뛰며 선거대책위원장 등을 맡는 게 더 적합하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한 다선 의원은 "한 장관의 능력을 모르는 게 아니나 현실 정치, 더군다나 선거 지휘는 검사·장관 때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일 것"이라며 "(비대위원장 직행은) 너무 도박이다. 실패하면 당과 개인 모두에게 큰 타격"이라고 말했다.
당내 논란이 한창이던 12월19일 한 전 장관은 '정치 경험 부족'과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 "세상의 모든 길은 처음엔 다 길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같이 가면 길이 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미 그때 한 전 장관의 결심이 선 것으로 풀이됐다. 이틀 후 장관직 사퇴가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김건희 문제로 시험대…고양이 목에 방울 달까
당내 우려들은 이제 고스란히 한동훈 전 장관이 입증해야 할 과제들로 자리하게 됐다. 최대 과제는 역시 윤 대통령과의 관계 설정이다. 전임 김기현 지도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수직적 당정 관계를 개선하지 못한 점이 꼽혀왔다. 10·11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등을 통해 드러난 윤석열 정부에 대한 부정적 여론에도 국민의힘은 쉽사리 '윤심'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최근 '윤핵관(윤 대통령 측 핵심 관계자)' 장제원 의원과 김기현 전 대표를 물러나게 한 주류 희생론 또한 윤심에 의한 것이라는 불안감이 당내 일각에 퍼져 있다. 당의 주류들이 물러난 자리를 검사와 대통령실 출신 인사들이 차지하는 이른바 '용산 공천'이 이뤄지는 게 아니냐는 시각이다. 한 전 장관도 비대위원장 취임 이후 주류 희생론 기조를 그대로 이어갈 가능성이 커 보이는데, 윤 대통령과의 거리두기가 동반되지 않으면 당내 반발을 피하긴 어려워 보인다. 이미 영남권 의원들 사이에선 한동훈 비대위원장에 대한 비토 분위기도 포착된다.
'용산 공천'에 대한 문제의식은 친윤계인 여권 주류들에게도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은 한 전 장관의 등판 여론을 형성해온 그룹이다. 오히려 측근 중 측근인 한 전 장관이라면 윤 대통령에게 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엿보인다. 한 전 장관의 평소 강직한 성격도 재조명되는 모습이다. 검찰 시절 한동훈 전 장관은 누가 뭐래도 개인의 소신을 굽히지 않기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그가 윤 대통령 등 검찰 선배들과의 술자리에서도 술을 거절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다는 일화가 있다. 검사 선후배가 아닌 대통령과 여당 대표의 관계에서도 한 비대위원장이 그런 강단을 보일 수 있을지 당내 다수가 주목하는 모양새다. 윤희숙 전 국민의힘 의원은 정치인 한동훈이 성공하기 위해선 윤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울 수밖에 없다면서 이를 '아름다운 뒤통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당장 한동훈 전 장관은 시험대에 오를 전망이다. 윤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각종 문제와 관련해서다. 특히 12월 내 야당은 김 여사가 연루된 주가조작 의혹 관련 특검을 처리할 전망인데 이에 대한 당의 대응이 주목된다. 윤 대통령이 거부권(재의 요구권)을 행사할 경우 총선을 앞두고 여론이 크게 악화할 수 있다. 당장 여권 내에선 특검을 수용하되 총선 이후로 시기를 미루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다만 이조차 윤 대통령이 받아들일지 미지수인데, 그렇다면 그에 대한 설득은 한 전 장관의 몫이 된다.
여당 내에선 한 전 장관이 다른 옵션을 고려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한 전 장관은 12월19일 김건희 특검법에 대해 "다음 총선에서 민주당이 원하는 선전·선동을 할 수 있게 시점을 특정해서 만들어진 악법"이라고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일단 드러냈다. 당내에서도 '대통령과 결혼하기 전에 벌어진 일에 대한 특검법은 과도하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대통령 일가 등을 감시하는 특별감찰관 임명, 대통령 부인을 관리하는 제2부속실 설치와 함께 최근 불거진 명품가방 수수 의혹과 관련한 김건희 여사의 공식 사과를 이끌어내고 "디올백 사건의 엄중 수사와 처벌" 의지를 밝힌다면 특검법 거부권 행사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핵관' 리스트가 벌써 돌기도
한 전 장관 비대위원장 추대에 윤 대통령의 의중, 즉 윤심이 작용했는지도 계속 논란 중이다. 친윤계 인사들이 한 전 장관 추대 여론을 적극 조성하는 장면으로 윤심에 대한 의구심이 커진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권에선 한 전 장관의 비대위원장 등판을 두고 윤 대통령이 오히려 못마땅해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태양은 하나밖에 없다'는 필연적인 권력의 속성 때문이다. 현재의 권력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차기를 도모할 수 있는 새 인물이 등장할 경우 권력의 추는 이동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충돌이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당시 여권의 권력추가 이명박 대통령에서 박근혜 비대위원장으로 급격히 이동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윤 대통령도 이를 모를 리 없다는 시각이다.
한동훈 전 장관의 등판으로 단순히 당권의 이양이 아닌 집권 세력 내 권력 이동이 조기에 시작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여권의 차기 대권주자로 떠오른 한 전 장관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경우, 내년이면 집권 3년 차인 현재의 권력이 이른 시간에 차기 권력에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는 셈이다. 통상적으로 권력의 이동은 같은 진영 내에서도 반대 세력에게로 이뤄지기 마련이지만 지금은 현 권력과 차기 권력이 가장 가까운 사이라는 점이 미묘하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비대위의 성공, 총선 승리가 절실한 윤 대통령 입장에선 딜레마에 빠지게 된 셈이다.
오히려 여당 지도부와 주류가 윤 대통령의 '최측근 한동훈'이 아닌 '차기 대권주자 한동훈'을 전략적으로 등판시킨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진중권 광운대 특임교수는 "윤 대통령에 대한 기대감을 한동훈에 대한 기대감으로 옮겨놓고, 정권 재창출에 대한 희망을 만들어 보수층을 결집시키겠다는 게 여당 지도부의 판단"이라며 "이렇게 되면 여권 내 권력 이동이 벌어질 것이다. 사실 대통령으로서도 반가운 일은 아니다. 레임덕 상태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내다봤다.
당장 여권 일각에선 한 장관과 친분이 있는 이른바 '한핵관(한동훈 핵심 관계자)' 리스트가 돌기 시작했다. 이를 두고 당내 권력이 윤핵관에서 한핵관으로 옮겨갈 조짐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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