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는 가고, 정치꾼이 온다… 불출마의 역설[윤다빈의 세계 속 K정치]
올해 10월 공화당 강경파 주도로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 하원의장에서 해임됐던 케빈 매카시 전 의장(58)은 6일(현지 시간) 올해를 끝으로 의원직을 사퇴하겠다면서 이같은 이유를 밝혔습니다. 그는 실제로 19일 의회에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습니다. 하원의원 임기는 2025년 1월까지인데, 이보다 1년여 앞서 의원직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매카시 전 의장은 15년 간 의원 보좌진으로 활동하다 2002년 캘리포니아 주의원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정치 행보를 시작했습니다. 2006년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원에 당선된 뒤 한 차례도 낙선하지 않고 임기 2년인 하원 선거에서 내리 9선에 성공했습니다. 2014년과 2018년에는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로 뽑히며 중앙 정치에서의 영향력을 키워갔습니다.
공화당 안팎에서는 그가 대통령과 부통령에 이어 미국 권력 승계서열 3위인 하원의장이 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의장직에 오르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공화당 강경파가 영향력 과시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원의장 해임 기준을 간소화하고, 자신들을 주요 상임위원회에 배치해달라면서 올해 1월 하원의장 선거를 15차례나 무산시켰습니다. 매카시는 결국 이들의 조건을 수락하며 어렵게 하원의장에 선출됐습니다.
그는 내년도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도 정부가 일시적 업무 정지(셧다운)에 이르는 사태를 막기 위해 중재안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당내 강경파 의원에 의해 번번이 가로막혔습니다. 결국 상대편인 민주당과 손잡고 초당적 법안을 만들어 통과시켰습니다. 그는 “요즘 워싱턴에서는 (초당적 협력이) 유행이 지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미국 국민을 위해 성과를 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국가적으로는 셧다운 위기를 극복한 셈이었지만 매카시 개인에게는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공화당 강경파는 부채한도 삭감이라는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반영되지 않자 매카시 의장에 대한 해임 투표에 나섰습니다. 그는 소수 강경파에 의해 미 의회 역사상 처음으로 하원의장에서 쫓겨나는 불명예를 안게 됐고, 결국 의원직 사퇴를 선언했습니다.
● “극단 정치 염증” 미국 역대급 불출마 행렬
매카시 전 의장처럼 많은 미국 정치인이 의회 정치에 염증을 느끼면서 정치권을 떠나고 있습니다. 내년 11월 대선과 함께 치러질 상·하원 선거를 앞두고 불출마를 공식 선언한 이는 19일 기준 40명(상원의원 7명, 하원의원 33명)에 이릅니다. 주로 민주·공화당 온건파에 속하는 이들입니다. 의회를 떠나는 의원 수가 최근 10년 기준으로 가장 많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꽃길이 보장된 현역 의원들이 불출마를 선언하는 이유는 정치적 양극화로 인해 극단적 대립이 심해지면서 대화와 타협의 문화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핵심 기관인 의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좌절감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민주당 소속으로 10선을 지낸 브라이언 히긴스 하원의원(64·뉴욕)은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에 “올해 워싱턴 D.C.의 속도는 특히 느리고 실망스러웠다”며 “심사숙고 끝에 저는 의회를 떠나 지역사회에 봉사할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다만 불출마 행렬로 생긴 빈자리를 양당 강경파가 차지하면서 정치 양극화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도 나옵니다. 특히 공화당의 경우 강성 트럼프 지지자가 대거 의회에 진입할 것으로 보입니다. 미 정치전문 매체 액시오스는 “(불출마 행렬이) 강경파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줄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 인재는 떠나고 정치꾼은 버틴다
K정치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소방관 출신의 더불어민주당 오영환 의원은 올해 4월 10일 내년 총선을 딱 1년 앞두고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습니다. 오 의원은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 정치는 상대 진영을 누가 더 효과적으로 오염시키는지를 승패의 잣대로 삼으려 한다”며 “오로지 진영 논리에 기대 상대를 악마화하기에 바쁜, 국민이 외면하는 정치 현실에 대해 책임 있는 정치인의 한 명으로서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고 반성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소방관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정치인의 소명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여의도의 매력은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겠다는 다짐으로 정치권에 입성했지만 진영 논리, 당리당략, 정치적 생존을 위한 투쟁 앞에 무력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실제로 다음 선거에서 당선되기 위해서는 공천을 받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중앙당에서 권력자와 가까워지거나 지역 기반을 탄탄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입니다. 재선을 원할수록 당내 권력자와 밀착하고, 지역구 민원을 챙기는 직업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영남지역 법조인 출신의 한 초선의원은 국회의원이 되고 지역구 의원으로서 챙길 행사가 너무 많아 놀랐다고 했습니다. 지역구 행사가 많을 때는 하루에 10건 가까이 있는데, 축사하다 보면 하루가 다 갔다고 했습니다. 평소에도 조찬 모임부터 시작해 세미나, 친교 활동, 식사 모임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정치적 비전이나 정책에 대해서 고민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 불출마 행렬에도… 與 친윤·초선, 野 친명·86 침묵
국민의힘은 당을 혁신해야 할 초선의원 대부분이 앞다퉈 윤심(尹心)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친윤을 자처하는 초선들은 지난 전당대회 과정에서 나경원 전 의원 불출마 연판장을 돌리고, 최근 김기현 대표 사퇴를 막고자 의원 대화방에서 집단행동을 벌였습니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제기된 친윤·영남 중진 희생 문제는 김기현 대표 사퇴와 장제원 의원 불출마 이후 진전이 없습니다. 용산 대통령실 출신 인사들은 국민의힘 텃밭에 대거 출마하면서 꽃길을 걷고자 합니다.
박지원·정동영·천정배 등 과거 민주당의 주축이었던 ‘올드보이’들은 호남에서 재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대다수 친이재명 세력은 이 대표의 호위무사 역할을 자처하면서 비명계 의원 지역구에서 자객 공천을 노리는 형국입니다.
국회의 신뢰도를 떨어뜨린 이들은 다음 선거 준비에 혈안이 돼 있는데, 정작 의정활동에 최선을 다한 이들이 책임을 지고 정계를 떠났습니다.
불출마의 역설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혁신을 꿈꾸는 유능한 이들은 떠나지만 금배지만을 꿈꾸는 정치꾼들은 그 빈자리를 차지하려 합니다. 특히 ‘윤석열 대 이재명’의 재대결 구도로 치러지는 다음 총선에서는 민심이 아닌 권력자의 마음을 쫓는 이들이 대거 등장할 것으로 보입니다. 매번 최악이라는 비판을 받는 국회가 지금보다 더 짠 맛이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윤다빈 기자 empt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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