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파고스 섬' 된 전북 … 지역현안 정쟁 도구화 안 된다
정치가 최상위 개념에 있는 한국의 정치 구조에서 필요하다면 지역현안도 정쟁의 도구로 삼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새만금 제25회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대회는 전 국민적 기대 속에 올해 8월 1일 팡파레를 울렸지만 초기 위생 문제와 무더위·의료·해충·음식 등 기본적인 서비스 대응을 소홀히 하다 '파행'이란 굴욕적 수식어를 붙이게 됐다.
위생 문제에 대한 국내외 비판에도 조직위는 별일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가 한덕수 국무총리가 8월 4일 양팔 소매를 걷어붙인 셔츠 차림으로 변기에 묻은 오물을 직접 휴지로 닦은 후에야 청소 인력을 늘리는 등 뒤늦게 시설 개선에 돌입하는 대응의 허술함을 노출하기도 했다.
아무튼 정부의 노력으로 3만6000명이 버스 100대로 나눠 타고 수도권 등 전국 각지로 이동한 참가 대원들은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낸 뒤 귀국했다.
여기까지가 세계적인 청소년 야영 축제의 영역이었다.
그 이후 파행 책임론을 둘러싸고 여야 간 공방이 치열하게 벌어지면서 청소년 축제는 '정치의 영역'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갔다.
여권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주도한 행사인데 민주당이 사법리스크를 덮으려 악용하고 있다고 야권을 공격했고, 야당은 축제가 아닌 생존게임으로 변했지만 여당 때 5년간 준비해온 책임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고 여권을 조준하는 등 정치권에서는 연일 '대책 없는 난타전'을 벌였다.
급기야 감사원이 8월 16일 공식 입장을 내고 "새만금 잼버리 대회와 관련한 감사를 위한 준비 단계에 착수했다"고 발표했다. 국내 최고의 감사 기관이 감사를 통해 책임소재를 밝히겠다고 말한 만큼 그 결과를 지켜보면 될 일이었지만 정치권은 그렇지 않았다.
국민의힘 정경희 의원은 "전라북도의 꿍꿍이는 새만금 개발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핑계 좋은 볼모로 새만금 잼버리를 유치하는 것"이라고 힐난했다.
국회 예결특위 국민의힘 간사인 송언석 의원은 "전라북도가 잼버리를 핑계로 새만금 관련 SOC 예산 빼먹기에 집중했다. 이런 예산이 합치면 11조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계속해서 전북을 궁지에 몰았다.
이런 여권의 주장에 장단을 맞추듯 정부도 올해 8월말에 새만금 주요 SOC 예산을 대거 칼질하는 '내년도 예산안'을 확정해 국회로 넘기게 된다. 국민의힘이 전북을 '예산 빼먹는 지자체'로 폄훼하고, 마치 정부가 화답이라도 하듯 새만금 예산을 부처안(案) 대비 무려 78%나 대거 삭감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다.
여기서부터 새만금 사업도 '정쟁의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전북도의원 출신의 K씨(64)는 "잼버리를 빌미로 새만금이 정치영역을 빨려 들어간 때가 바로 이때"라며 "전북의 급소인 새만금을 세게 누르면 지역민들이 발끈할 것은 삼척동자고 다 아는 사실인 데 정부가 실제로 새만금 예산을 대거 난도질함으로써 정치의 영역으로 밀어 넣은 꼴이 됐다"고 말했다.
전북의 정치 시계는 곧바로 멈췄다.
종교처럼 내일의 희망이었던 새만금의 주요 사업 예산이 아예 단 한 푼도 계상되지 않거나 80% 이상 싹둑 잘려나간 초유의 사태를 바라보며 전북도와 전북 출신 국회의원은 물론 시군의회와 시민·사회단체 등이 "새만금 예산을 살려내라"고 줄줄이 들고 일어섰다.
전북출신 국회의원들은 삭발투쟁으로 강력 반발에 나섰고, 전북도의회는 삭발에 단식투쟁과 함께 국회까지 마라톤을 하며 새만금 예산 원상복구를 외치는 등 대항쟁의 선봉에 섰다. 눈물겨운 외로운 투쟁은 계절이 두 번 바뀌고 100일을 넘기게 된다.
두 차례의 서울 상경투쟁과 2500여 명의 기업인 서명 건의 등 지난 4개월 동안 전북에서는 오직 새만금 시계만 작동했다. 새만금이 정치 영역에 깊숙이 들어오며 지역구도가 사라지지 않은 내년 총선의 선거 국면에서 민심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정치공학적으로 볼 때 정부여당에 대한 전북의 반발이 심할수록 전북은 정치적 고립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 영호남 구도에서 전북을 바라보는 영남권의 시선도 싸늘해지는 등 전북은 '갈라파고스 섬'으로 변하게 됐다.
더불어민주당 출신의 한 정치인은 "전북 입장에서 보면 최대현안이 폭탄을 맞은 상황에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며 "퇴로가 막힌 상황에서 끝까지 투쟁할 수밖에 없는 외통수에 걸린 느낌까지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넓게 보면 민주당이 거대야당의 위치에 있지만 전북 민주당은 새만금 현안에 갇혀 대(對) 정부여당 투쟁 외에 아무 일도 못하게 됐다.
정부여당의 새만금 예산 칼질은 엉뚱하게도 '전북의 국민의힘'을 최대 피해자로 만들어 버렸다. 지역민들의 반발이 거셀수록 국민의힘 전북 지지세력은 설 땅을 잃게 되었던 까닭이다.
여권 성향의 한 원로 정치인은 "지난 30여 년 동안 피와 눈물과 땀으로 일궈온 민주당 텃밭내 국민의힘 영토를 한순간에 잃어버리게 됐다"며 "올 상반기까지만 해도 전북 국민의힘 지지기반이 아주 좋았는데 지금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1990년대의 동토(凍土)로 퇴행한 상태"라고 하소연했다.
참여자치 전북시민연대의 한 관계자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권 심판론'이 더욱 강하게 회자하며 '묻지마 투표'로 갈 공산이 크다"며 "'정권심판론'이 모든 어젠다를 흡수하게 된다면 전북은 '도로 민주당'으로 회귀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전북의 권력인 민주당에 대한 심판과 정권 심판이라는 양측에서 접근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을 상황이라는 강한 우려이다.
여권 성향의 전직 정치인도 "전북 국민의힘 입장에서 보면 내년 총선은 '선거는 있어도 선택은 없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특정정당 후보가 독식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감이 크다"며 "한쪽에 편향된 전북 정치구도는 고립을 자초하고 동종교배를 부추겨 경쟁력을 떨어뜨릴 뿐인데 상황은 자꾸 그렇게 변해 가는 것 같아 심히 걱정된다"고 술회했다.
전북의 민주당은 전국적으로 고립되고, 전북의 국민의힘은 전북에서 외딴섬으로 전락한 상황은 끝없이 악화일로를 걸었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전북정치는 기울기가 더 심해지는 등 민주당은 텃밭을 견고히 다지는 계기를 마련했지만 내년 총선을 앞두고 공천경쟁만 유례없이 치열할 전망이다. 민주당 출신 입지자들은 가뜩이나 공천만 받으면 여의도 입성은 '떼어놓은 당상'이었다.
이런 입지자들이 새만금 파동을 겪은 후 공천을 받아 국회로 가면 전북민심이 아니라 오직 중앙당 눈치만 볼 것 아니겠느냐는 뜻있는 인사들의 걱정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지역현안이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순간 정치 공학적 시스템에 의해 끌려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국가적 통합이나 지역 균형발전, 공정과 상식의 시스템을 작동해서 현안을 풀어가야 한다. 지역현안이 정치적으로 휘둘리면 많은 후유증을 남길 수 있다.
학계의 한 관계자는 "잼버리와 새만금 등 지역현안은 상생정치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정쟁의 도구'로 전락해선 안 된다"며 "앞으로 여야 거대정당부터 현안을 정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가는 일을 중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기홍 기자(=전북)(arty13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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