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리즘의 종말 [이슈&뷰]
美, 반도체 등 첨단기술 무기화
中은 희토류 등 자원으로 대응
“정부, 지리적 확대로 국익 모색”
1990년대 이후 세계 경제 질서를 주도하던 ‘글로벌리즘’이 종언을 고했다. ▶관련기사 2·3면
국경을 초월한 생산의 분업화와 무역의 자유화에 기반해 세계 경제의 통합적인 질서를 지향하던 ‘세계화’시대가 끝났다. 2023년 미국과 중국은 첨단제품과 자원의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한 무한경쟁을 벌였고, 세계 경제질서는 자유 서방과 권위주의 체제 진영으로 빠르게 ‘블록화’돼 갔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일어난 우크라이나 전쟁은 두 진영으로의 신냉전 구도를 가속화시켰고 자원 공급 위기와 지정학적 불확실성을 고조시키며 세계화의 종말을 재촉했다.
미국은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기술을, 중국은 희토류를 비롯한 광물 자원을 무기화했다.
세계 전체의 무역 성장은 더뎌진 대신 지정학적 동맹을 맺은 블록간 교역은 강화됐다.
국제통화기금(IMF)는 세계 경제의 블록화가 지속된다면, 경제성장은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신흥국과 개발도상국의 손실은 더 클 것이라는 진단이다. 뿐만 아니라 인구·기후·식량·안보 등 인류 공통의 과제 해결도 위기를 맞게 된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최근 “세계화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우리는 너무 안일했다. 세계화는 건강할 수 있지만 우리가 제대로 일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었다”고 했다. 그는 미국의 초당적 외교 연구 기구인 외교협회 행사에서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갈등, 다시 불거진 중동 분쟁 등 최근 지정학적 위기에 따른 세계화의 퇴조 현상에 대해 반성의 목소리를 냈다.
글로벌리즘의 퇴조는 세계 무역의 부진으로도 드러난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의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상품·서비스 무역액 규모는 지난해 32조2000억달러(4경2000조원)에서 올해 30조7000억달러(4경원)으로 줄어들 것으로 추산됐다.
UNCTAD는 고금리에 따른 경제 위축과 미중 긴장에 따른 공급망 재편, 보호무역 정책 등이 무역 위축에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했다.
WTO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등 서방 진영과 중국·러시아 및 협력국으로 구분되는 양대 블록을 오가는 무역흐름은 각각의 블록 내부에서보다 4~6% 느리게 증가했다. 보고서는 “세계 무역이 두 블록으로 분할되면 전세계 실질 소득이 약 5% 손실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랄프 오사 세계무역기구(WTO)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세계 무역에서 나타나는 분열 징후가 향후 세계 경제의 성장과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세계 경제에서 거침없이 몸집을 키워온 중국과 그 도전을 뿌리치려는 기존 패권국가 미국의 대립은 세계화 시대 경제 구조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미국은 친환경 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규정을 강화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첨단 반도체 투자를 자국 내로 유치하려는 ‘칩스법(CHIPS)’ 등을 통해 중국을 첨단 산업 공급망에서 배제했다. 여기에 중국은 희토류와 흑연 등 핵심 광물의 수출을 제한하고 자국 내 외국기업에 대한 감시를 강화함으로써 대응하고 있다.
한국, 일본과 유럽연합(EU) 등 각국도 미국과 유사한 법을 통해 기업들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경쟁하면서 자국은 물론 우호국·인접국 내에 공급망을 재편하는 ‘리쇼어링’, ‘프렌드쇼어링’이 대세가 되고 있다.
브렌던 맥케나 웰스파고 국제 이코노미스트는 “지정학적 균열이 발생하면 무역협력이 줄어들고 각 나라는 서로 정보와 기술을 공유하려 하지 않는다”면서 “결국 그것은 ‘탈세계화(De-globalization)’을 추동하는 힘으로 작용한다”고 지적했다.
지난 수십년 간 진행돼 온 세계화가 글로벌 경제와 시민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카토 연구소는 “세계화가 대중 번영, 평화, 민주화를 달성하긴 커녕 빈곤, 실업, 경제적 위?성과 지정학적 불안을 초래했고 중산층을 공동화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고 지적했다.
내년은 정치적 변동성이 세계화의 느슨해진 연결고리를 노릴 전망이다. 브라이스 엥겔란드 산업분석가는 “2024년 미국, 인도, 대만과 인도네시아 등 50개 이상의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치러지는 주요 선거에서 포퓰리즘 운동은 기성 정치권에 도전할 것이고 세계 경제는 여러 도전과 불확실성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캐롤라인 프로인트 전 세계은행 이사는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탈세계화’가 아니라 ‘세계 경제의 재편’”이라며 ‘세계화의 종언’에 대해 부인한다.
중국이 세계 무역에서 철수하더라도 베트남, 태국, 한국, 멕시코 등 새로운 나라들이 새로운 무역질서에 참여하고 있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와 같은 지역적 유대가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외교협회는 “기업들은 세계화가 여전히 비용 감소와 이익 증대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정부 역시 지리적 확대를 통해 안보와 경제적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원호연 기자
why3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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