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파라 치부하기는 박하다, 눈물보다 가슴을 울린 김윤석의 이순신('노량')
[엔터미디어=정덕현의 그래서 우리는]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이미 수백 번은 반복됐을 이순신 장군의 서사를 담은 콘텐츠들에는 모두 이 말이 정점에 찍혀 있다. 총탄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하는 이 말은 임진왜란 7년을 끝내는 노량해전의 승리를 상징하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이순신이라는 존재만으로도 벌벌 떠는 왜군들이었으니 죽음조차 숨기려 한 그 마음이 끝내 전쟁의 승리를 가능케 했으리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량>, <한산>에 이어 김한민 감독이 그린 이순신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노량: 죽음의 바다>에는 이런 이순신의 마무리가 조금은 다르게 해석되어 있다. 전투 중에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극적인 장면 대신 김한민 감독은 북채를 들고 끝없이 북을 치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채워 넣었다. 말보다는 '북소리'가 이순신 장군의 최후에 울려퍼진다.
그리고 전투가 끝나고 승리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에야 비로소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모습이 등장한다. 거기서도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말 대신,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말한다. "싸움이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그건 저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에 담긴 전술적인 의도보다는, 치열하게 죽음 앞에 사투를 벌이며 싸우고 있는 장수들과 병사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의도가 더 들어있다. 마지막 한숨까지 장군으로서 해야 할 자기 역할을 다하고 눈을 감는 모습이랄까.
그 유명한 말 대신 영화의 대미를 가득 채우는 건 북소리다. 죽음 끝까지 멈추지 않고 울려퍼지는 북소리.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와 효과가 담긴다. 그건 이순신 장군이 끝까지 존재한다는 의미이고, 병사들에게는 그가 자신들과 함께 계속 싸우고 있다는 뜻이며, 적들에게는 그가 건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적장은 심지어 이 북소리에 미쳐버린다.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끝까지 밀어붙이는 이순신의 공격이 울려퍼지는 북소리에 담기기 때문이다.
실로 북소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슴을 울리는 힘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그 끝없는 반복이 만들어내는 먹먹한 효과로서 신파적 기능을 갖는 면도 있다. 하지만 영화가 그 북소리라는 정점을 향해 앞에서부터 촘촘히 쌓아가는 빌드업의 과정을 보면 그걸 그저 신파라 치부하기는 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노량>은 이순신의 최후를 담는 작품이지만, 이를 통해 '죽음'에 대한 관점이 담긴 작품이기도 하다.
첫 시작부터 곧 숨이 멎을 것처럼 힘겹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이순신의 숨소리로 시작하는 건 그래서다. 그는 몸도 마음도 쇠했다. 어머니도 돌아가셨고 아들마저 왜적에게 살육당했다. 제 살점 같은 혈육들을 잃고 나서 그에게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건 막바지로 가고 있는 전쟁도 마찬가지다. 함께 7년을 싸웠던 무수한 장수들이 죽어 바다로 수장됐다. 그에게는 죽은 아들이 꿈에 나타나고 또 함께 싸웠던 장수들의 환영들이 보인다.
그래서 노량에서의 일전을 향해 나아가는 이순신은 마치 눈앞에 보이는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피하지 않고 나아가는 모습처럼 보인다. 먼저 죽어간 장수와 병사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힌 문서를 출정과 함께 불에 태우는 데는 이 죽음을 향한 길이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마음이 담겼다. 실로 영화는 혼전 속에 먼저 간 망자들이 왜적들과 싸우는 모습들을 이순신의 시선으로 그려낸다. 북소리는 그래서 병사들을 독려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망자들을 위한 진혼곡이 된다.
김윤석이 연기한 이순신은 죽음 앞의 공포와 전쟁의 힘겨움 가족의 죽음이 주는 고통 같은 것들이 거대한 바윗덩이처럼 짓누르고 있음에도 끝까지 나아가는 그런 인물이다. 자식의 사망 소식을 듣고 비틀거리자 무장들이 부축하려 할 때 "혼자 가겠다"고 말하는 인물.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웅'이라 불리는 민족적 영웅이지만, 그것보다 더 강렬하게 남겨지는 인상은 누구나 마주하고 있는 죽음 앞에 흔들릴지언정 외면하지 않고 나아가는 모습이다.
<노량>의 북소리는 이처럼 전쟁에 울려퍼지는 소리와 먼저 간 이들을 위한 진혼곡과 망자가 가는 길에 흘러나오는 상여소리와도 겹쳐진다.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길게 자란 흰 수염이 보여주는 만만찮은 세월의 신산함 속에서도 앙다문 입과 흔들림 없는 눈빛에 담긴 의지가 엿보이는 김윤석이 연기한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 영화가 끝나고도 계속 귓가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북소리와 어우러져 긴 울림과 여운으로 남는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영화 '노량'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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