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V+ 조절” 알림에 나도 모르게…감염은 공동 영역인데 말이다

한겨레 2023. 12. 22.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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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의 의학과 서사]김준혁의 의학과 서사(80)
에이즈 감염 사례를 통해 본 의료윤리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해변의 승려(1809). 출처: 위키피디아

마지막으로 에이즈 환자를 진료했던 것은 인턴 때였던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검진하기 전에 컴퓨터가 환자에 대해 알려주는 몇 가지 사항이 있는 경우가 있다. 그건 별로 달갑지 않은 소식이다. 병원 직원이라거나 외국 국적이라는 사유는 사소한, 그저 어색함이 더해질 뿐인 일일 것이다. 환자가 감염병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조금 더 신경 쓰이는 경우다. 어쨌든 잇몸 검진을 받기 위해 치과에 오셨던 네모난 안경을 쓴 남자 환자분의 알림창에는 감염내과에서 남겨 놓은 경고문이 올라와 있었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양성(HIV+), 조절 중. 2000년대 중엽, 아직 에이즈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못했던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는지 조심해서 진료한 나는 뿌듯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 지금까지 환자 모습을 기억하고 있겠지.

학생 때나 이후 수련 과정에서(수련 과정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소아치과를 전공하고 이후 개원가에서 일한 내 경우 진료하면서 에이즈 환자를 볼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들리는 에이즈 환자에 관한 소문은 다분히 괴물에 관한 이야기를 닮아 있었다. 환자의 치과 수술을 위해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고, 사용한 재료나 기구들을 일괄 폐기하는 과정은 일상보다는 영화에 등장하는 외계인에 대한 처리 과정과 더 비슷하게 여겨졌으며, 해당 소식이 병원을 통해 전달되는 방식도 괴담의 유통(즉, 술자리든 그에 준하는 사담 자리를 통해 어깨 너머로 은밀히 전달됨)을 따랐기 때문이다. ‘무슨 과에서 에이즈 환자를 진료했대’라는 이야기는 한편으론 진료한 사람들의 안전을 바라는 기원으로, 다른 한편으론 위험한 대상의 침입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전해졌다.

그렇다. 십몇년 전 내가 경험한 우리의 에이즈 인식은 이 정도였다. 부끄럽게도, 에이즈 환자는 타인에게 생명의 위협을 끼칠 수 있는 괴물과 같은 존재로 이해되었고 그런 그림에서 나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이라고 많이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코로나19로 인해 감염병에 대해 언급할 기회가 많았던 지난 몇년, 엮어서 한국의 결핵이나 에이즈를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사람들이 알 거라고 생각하면서 “약을 계속 드시면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는 다른 사람한테 안 옮으니까요”라는 식의 언급을 할 때 사람들이 놀라는 표정을 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아직, 에이즈는 걸리면 죽는 천형이자 방종에 대한 신의 형벌로서 엄청난 힘을 지닌 병이라는 생각이 아직 우리 곁을 맴돌고 있다.

의료인류학자 서보경의 ‘휘말린 날들’은 한국의 에이즈를 정면으로 이야기하여 현재의 국면을 돌파하려 한다. 그는 심지어 우리가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감염을 일컫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감염한다”와 감염에 “휘말림”이라는 생소한 느낌의 표현을 끌어들여 상황을 기술하는 방식을 바꾸려 시도한다. 왜 그런가. 당연히 그만큼 세상의 벽이 견고하기 때문이다.

‘휘말린 날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많은 분께 절대 익숙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보경은 우리가 자랑하고 안전하다고 여겼던 한국 의료 체계가 어떤 희생과 배제를 통해 작동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사진 : 알라딘

‘휘말림’이란 무엇인가

‘휘말린 날들’을 간략히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책을 구성하는 일곱개의 장이 병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1장은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와 동성애 담론의 국제적 기원을, 2장은 한국에서 에이즈 서사가 구축되어 가는 역사적 과정을, 3장은 환자 및 주변 사람의 생애사를 통한 질환 경험 기술을, 4장은 의료와 사회 현장에서 환자에 대한 차별 현실을, 5장은 감염한 자를 겨누고 있는 법적 판결의 장치들을, 6장은 감염 개념을 다시 사유하기 위한 중동태의 검토를, 7장은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다른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1] 그러니 책을 하나로 꿰어 설명하는 것은 애초부터 실패할 기획이고, 이 형태로 차분히 읽어달라는 말씀 외에 평자로서 덧붙일 말은 없을 것 같다.

그러니 왜 읽을 필요가 있는지에 관하여만 생각해 보자.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선, 아마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고 그 접근을 위해 중동태라는 낯선 개념을 끌어들여야 하는 ‘휘말림’이라는 단어를 호출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테다. 능동태와 수동태 사이, 행함과 당함의 사이에 놓이는 중동태의 위치를 찾아내려 했던 일본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는 사건의 벌어짐은 주체의 행함과 외부의 강제 어느 한쪽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2] 그는 행함도 당함도 아닌, 또는 행함과 당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중동 상태가 언어의 원형이었으리라고 추측하고, 주체의 책임을 구별하기 위한 능동과 수동의 어휘는 나중에, 예컨대 법적 필요를 위해 구성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서보경에게 감염은 그런 중동의 상태다. 우리는 지금 감염되었다, 또는 감염당했다고 말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나 이런 표현이 현실을 제대로 그리고 있는가. 바이러스는 애초에 그 자신으로선 생명 현상 전체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모두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른 세포 안에 들어가서 세포의 여러 장치들을 이용할 때만 바이러스는 비로소 자신을 복제하고 확산할 수 있다. 바이러스와 세포가, 우리가 감염하는 것과 감염되는 것이라고 구분하고 있는 둘의 상호작용이 없다면 기실 감염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이런 생각이 꼭 세포의 미시 차원에만 적용될까. ‘휘말린 날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감염이 혼자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꾸로, 혼자만의 일이기만 하다면 감염이 그렇게 문제가 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감염병은 애초에 공동의 일이며, 따라서 책임을 사유하는 방식도 공동의 위치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렇기에 ‘휘말린 날들’은 말한다. “함께 겪어내 서로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유행이 요구하는 책임의 요체이다.”

이 정도까지 감염에 대한 다른 사유를 제시하는 책이라면, 읽을 이유는 충분하지 않은가. 에이즈에 대해, 그 현상과 작용과 경험과 피해와 반응과 혐오와 배제와 낙인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에이즈를 통해 다른 방식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우리의 모습들을 보여줄 테니 말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세포 내 활동에 관한 모식도. 바이러스는 숙주 세포 안으로 들어가 세포의 기구들(단백질)을 활용하여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생산, 복제한다. 즉, 바이러스는 숙주 세포와 뒤섞여 또는 ‘휘말려’ 작동한다. 한편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는 알엔에이(RNA) 바이러스로 여기에 역전사 과정이 추가된다. 출처: 위키피디아, 번역 및 설명: 필자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는 편익

너무도 뛰어난 책에 굳이 첨언할 필요는 없겠지만, ‘휘말린 날들’에 힘을 더하기 위해 의료윤리학자로서 책의 주장들을 전유해(또는 변형해) 하나의 주장으로 확정해 보자. 첫째, 한국 의료계 일반이 표준주의 지침(진료나 수술 과정에서 다른 사람이 감염되지 않도록 지켜야 하는 일반적인 지침을 말한다)을 지키지 않는 것은 인식 부족의 문제도 있지만, 그 이전에 해당 지침을 따를 자원이 없기 때문이다. 에이즈 환자들이 병원에서 박대를 경험한 것은(물론 의료인의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의료인의 한 명으로서 여전히 나는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의료 체계가 그런 지침에 비용을 지불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의료 효율성에는, 그 효율성을 방해하는 이들의 진료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다. 쉽게 말해 건강보험이,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는 법 체계가 에이즈 환자의 진료를 허용하지 않는다.

둘째, 나는 감염 환자의 상황을 의료윤리적 관점에서 가장 잘 설명하기 위해 ‘희생자이자 매개로서의 환자’(patient as victim-and-vector)라는 표현을 즐겨 인용한다.[3] 공동체의 관점에서 감염 환자는 감염병에 노출되어 피해를 입은 피해자이자, 동시에 타인을(인구의 관점에선 다른 집단을) 감염시킬 수 있는 매개이다. 공중보건은, 심지어 의료윤리의 문제는 이들의 이중성을 파악하는 데 실패한 것에서 연유한다. 그리고 이런 이중성은 사유의 변화를 요구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감염 환자에게 타인들을 위한 책임을 부여해 왔다. 쉽게 그들 또한 피해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매개라는 점만 강조하면서 타인에게 병을 옮기지 말라는 명령만 내려온 것이다. 이것은 지배적인 문화 코드, 개인의 잘못으로 인한 신체정신의 ‘오염’과 그 배제에 잘 맞기에 손쉽게 활용된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우리를 지키기 위해 환자를 희생하는 선택이다. 문제는 이런 선택이 이미 질병의 희생자인 이들을 더 나락으로 몰아넣는 것을 넘어, 이 방식이 우리를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이러스의 완전 격리 또는 ‘박멸’은 적어도 아직까진(그리고 앞으로도 상당히 오랫동안) 환상이다. 그것도 무척 해로운.

오히려 피해자이자 매개인 환자에게 부여되어야 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책임이다. (인과적이든, 은유적이든) 질병의 그물 안에 있는 환자는 자신의 삶을 위하여 자신을 지켜야 한다. 환자의 자기-지킴은 또한 타인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기에, 감염병 앞에서 공동체가 우선해야 할 앎과 삶은 강제가 아닌 지원과 협력이다. 환자의 능동성에 기댈 때에만 우린 감염병의 문제에 제대로 접근할 수 있다.

셋째, 상태 자체가 정체성이고 따라서 그 상태를 주체의 정체성과 분리하여 생각하기 어려운 장애와 달리, 감염병(적어도 감염원, 즉 감염을 일으키는 것)은 주체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는 에이즈 환자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으며, 나는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가 없는 세상을 더 선호할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둘을 구분하지 못하는 우리의 의지 결여와, 바이러스로 인해 이미 고통받는 이들의 고통을 더할 뿐인 사회문화적, 제도적 악이다.

다시 말해, 에이즈 환자는 타인의 편익을 위해 희생당해 왔다. 더 효율적인 의료 제공을 위해, 전통적인 비난과 배제의 기작을 활용하여 그저 손쉽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태를 제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익숙한 생각의 틀에 매여 우리는 우리 주변의 누군가를 버리는 선택을 해 온 것이다. 심지어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우리의 자랑이라고, 우리가 잘하고 있다고 믿으며.

결국 고민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정의로움이다. 정의가 이루어지는 방식을 크게 두 가지, 교정과 회복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의는 잘못을 고치는 한편, 피해를 보상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감염병의 피해자인 에이즈 환자들을 사회가 돕긴커녕 내치고 괴롭혀 왔기에, 지금 우리가 이들에게 보여야 할 정의는 회복이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와 제대로 관계 맺기 위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정의는 교정이다. 지금까지 바이러스와 환자를 잘못 대해 왔기에 지금의 파국이 벌어진 셈이라면, 다시 생각해 볼 때가 되지 않았나.

참고 문헌

서보경. 휘말린 날들: HIV, 감염, 그리고 질병과 함께 미래 짓기. 반비. 2023.

고쿠분 고이치로. 박성관 역. 중동태의 세계: 의지와 책임의 고고학. 동아시아. 2019.

Battin MP et al. The Patient As Victim and Vector: Ethics and Infectious Disease. OUP. 2008.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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