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간 찍은 서울·뉴욕 사진 보며 외쳤죠… 아, 삶은 고통이로구나”[M 인터뷰]

안진용 기자 2023. 12. 22.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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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 인터뷰 - 사진집 ‘삶이라는 고통’ 발간… 한국 포크록 대부 한대수
1960년대부터 2007년까지
두 도시 모습 수십만장 촬영
거리의 활기·절망 모두 담아
인생에 사랑·성공도 있지만
나이 들고 보니 99%는 고통
폰카는 0.1초만에 나오지만
필카는 인화까지 사흘 걸려
한 컷 한 컷 더 신경쓰게 돼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이젠 아빠·남편이자 ‘식충이’
가수 한대수는 “지구를 지켜야 한다”고 거듭 외친다. 핵무기를 포함해 우리가 쓰는 수많은 플라스틱이 모두 “지구를 해치는 공해”라는 경고다. 그가 지향하는 ‘행복의 나라’와 존 레넌의 ‘이매진’으로 가기 위해 “당장 지구를 보호해야 한다”며 한대수는 기타를 들고 노래를 한다. 북하우스 제공

‘삶이라는 고통’(북하우스), 가수 한대수(75)가 최근 발표한 사진집의 이름이다. ‘거리의 사진작가 한대수의 필름 사진집’이라는 부제도 붙었다. 이 두 문장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삶=고통’으로 정의한 한대수는 오랜 기간 작가로도 활동하며 ‘필름’ 사진을 찍어왔다. 또한 ‘거리의 사진작가’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줄곧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피사체를 담았다. 그렇게 한대수가 거리에서 직접 본 1960년대부터 2007년까지 서울과 뉴욕 등의 모습이 그의 필름 속에 흑백 혹은 컬러로 박제됐다. 2017년 뉴욕으로 건너간 한대수는 수십만 장에 이르는 네거티브와 슬라이드 필름을 정리하고 한 권의 책으로 집대성하며 이렇게 외쳤다. “아… 삶은 고통이로구나.”

한대수가 1966년 일했던 미국 뉴욕 레스토랑 ‘세렌디피티3’. 이곳에서 비틀스 멤버 존 레넌을 만난 한대수는 “존, 당신의 음악을 사랑해요”라고 고백했다. 북하우스 제공

초겨울 추위가 아직 견딜 만하던 12월 중순 밤 9시쯤, 뉴욕 퀸스에 사는 한대수의 전화를 받았다. 특유의 호탕한 웃음으로 인사를 건넨 그는 “녹음해도 돼요. 정확하게 쓰려면”이라고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됐음을 알렸다. 유독 웃음이 크고 잦은 한대수가 75년 삶의 끝에 꺼낸 키워드는 왜 ‘고통’이었을까. 이를 첫 질문으로 던졌다.

“나이 들고 보니까… 사랑과 우정, 성공과 같은 아름다운 부분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과정은 고통이었어요. 숫자로 따지자면 99%죠. 엄청나게 고생해서 좋은 대학에 가면 그걸로 끝인가요? 또다시 무언가를 일구기 위해 고통의 시간을 보내죠. 그렇다 살다 보면 가족이나 친척들이 떠나요. 1년 전에는 절친한 친구도 잃었죠. 잠시 고개를 들어 아름다운 구름을 감상하려는 찰나에도 누군가는 또 세상을 떠나고 있어요. 그렇다 보니 ‘참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 대부분이구나’ 싶더군요. 그래서 이 책의 영어 제목도 ‘I suffer therefore I am’이죠.”

삶을 대하는 이런 태도는 그의 굴곡진 인생과도 관계가 있다. 연세대 신학대 초대 학장인 고 한영교 박사를 조부로 둔 그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실종됐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은 알 수 없었다”고 말한다. 결국 뉴햄프셔주립대 수의학과에 진학했으나 적응하지 못해 중퇴했고, 뉴욕 인스티튜트 오브 포토그래피 사진 학교를 택했다. 그의 결핍은 예술의 연료가 됐다. 하지만 그의 행보를 반대한 조부는 지원을 중단했다.

한대수의 음악적 동료로서 1960∼1970년대를 함께 풍미했던 가수 송창식(왼쪽)과 그룹 펄시스터즈. 북하우스 제공

이후 빈민가인 이스트빌리지에 흘러들어가 살던 한대수를 보다 못한 가족들이 그를 한국으로 데려왔다. 또 다른 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 등이 담긴 1집 ‘멀고 먼 길’(1974)을 발표하며 한국 최초 싱어송라이터이자 포크록 대부의 탄생을 알렸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이 노래들은 정부에서 인증한 ‘금지곡’이 됐다.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10대 때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부모의 사랑을 모르죠. 그래서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사진을 찍고, 작곡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한국에 와서 활동할 때는 장발과 나팔바지 차림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어요. 어머니도 TV 속 제 모습을 창피해하셨죠. ‘물 좀 주소’는 사실 화폐(돈) 부족으로 인한 고통을 노래한 거였어요. 그게 질리도록 싫어서 ‘물 좀 주소’라고 노래한 건데, 또 못 부르게 하더군요. 하하.”

발표한 대다수 노래가 금지된 한국 사회에서 한대수가 설 곳은 많지 않았다. 다시 뉴욕으로 건너간 그는 상업 사진가로 오래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사진전도 열었고 ‘침묵’이나 ‘작은 평화’ 등 사진집도 출간했다. 하지만 그의 사진집에 그 흔한 ‘디카’나 ‘폰카’ 사진은 없다. 철저하게 필름 사진을 고집했다. 왜일까.

“디카는 0.1초 만에 사진이 나오는데, 필름은 3일은 걸려요. 찍을 대상을 정하고 초점을 맞추고 빛의 광도를 측정합니다. 암실 작업 후 인화도 해야 하니까 공이 많이 들죠. 곧바로 확인이 안 되니 한 컷 한 컷 더 신경 써서 찍어야 해요. 그리고 스마트폰은 너무 선명해요. 코털까지 다 나오잖아요. 하하. 필름은 ‘아웃라인’이 더 부드럽죠. 그런데 따지고 보면 필름으로 사진을 찍는 게 공해예요, 공해. 현상과 인화 과정에서 쓰이는 약품들이 독약이에요. 환경에도 안 좋고, 몸에도 안 좋죠.”

1960년대 서울 종로의 모습. 지게꾼이 위태로운 모습으로 쪽잠을 자고 있다. 북하우스 제공

한대수는 이번 사진집을 통해 그 ‘아웃라인’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특히 1960년대 말 서울과 뉴욕 풍경을 담은 흑백 사진이 인상적이다. 동시대라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로 대조적인 풍경을 통해 당대의 문화와 역사를 비교해 볼 수 있다. 68혁명 시기의 자유분방한 공기와 활기,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도시 빈민의 실의와 절망이 뒤섞인 뉴욕의 모습, 개발도상국이 되기 전 가난한 도시민의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서울의 모습은 기록 사진으로서도 의미가 있다.

한대수의 첫 아내인 김명신 디자이너. 한대수는 사진집에서 “맨해튼에서 다시 만난 명신은 아주 우울했고, 옥사나의 제의로 셋이 한동안 한 아파트에 살았다”고 고백했다. 북하우스 제공

또한 한대수는 1969년 TV쇼에 출연할 때의 촬영 풍경, 첫 번째 아내 김명신을 찍은 사진과 함께했던 공간을 보여주는 한편, 뉴욕·모스크바·파리·쾰른·상하이의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사진도 담았다. 필름 카메라의 시선은 노숙자, 거리의 악사, 고독한 노인들을 향한다. 세상을 여행하며, 일상의 찰나를 포착한 이들 사진에서는 고통, 외로움, 쓸쓸함, 고단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따지고 보면 로커들은 일찍 죽었어요. 지미 헨드릭스, 커트 코베인 등…. 그런데 전 올해 만 75세가 됐어요. 참 오래 살았죠. 하하. 사는 동안 죽음과 세 번 싸웠고, 이혼도 하고 빚쟁이에 쫓겼어요. 아직 살아 있는 건 기적이에요. 그래도 81세 폴 매카트니 형님, 80세 믹 재거 형님도 정정하시니까 저 역시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숨 쉬고 있습니다.”

‘삶이라는 고통’이라는 사진집은, 가수보다 더 안정적인 밥벌이가 됐던 자신의 또 다른 인생에 대한 반추이자 정리다. 더 이상 필름 사진을 찍지 않는 사회를 향해 ‘필름 사진가’가 고하는 인사이기도 하다. 그 저변에는 기술 발전이 인간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한대수의 고민이 깔려 있다.

“기술이 발전하고, 세계 리더들이 모두 일류 대학 출신인데 세계는 더 위험하고 악해지고 있어요. 75세 된 할아버지 관점에서 볼 때, 기술의 발전은 더 인간미를 잃게 합니다. 이 사진집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완성했는데, 마지막 챕터인 ‘사랑과 평화’(Love & Peace) 부문과 현재 지구촌의 상황이 슬프게도 매치가 되네요. 젊은이들이 스마트폰에 빠져 책을 읽지 않는 것도 재앙이에요. 그러니 잘못된 정보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제대로 된 판단을 못 하는 겁니다. 기술의 발전이, 과연 제대로 된 발전인가요?”

2001년 9·11 테러 이후 긴장감이 고조된 가운데 2003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평화 시위. 한대수는 한평생 반전 운동가로서 ‘사랑과 평화’를 부르짖었다. 북하우스 제공

2016년 뉴욕으로 건너간 한대수는 요즘 가수도, 사진작가도 아니다. 아빠이자, 남편으로 산다. 아침 6시에 눈떠 딸 양호(16) 양을 등교시키고, 아내 옥사나(53)와 시간을 보낸다. 끼니 챙기는 게 주된 일이다.

“세 끼 챙기냐고요? 우리가 세 끼 먹을 자격이 있나요. 하하. 브런치하고 저녁, 두 끼를 준비합니다. 저는 이제 음악가가 아니라 식충이에요, 식충이.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또 딸을 학교 보내고, 하교하면 야구하고 이야기하느라 바쁘게 보내요. 그게 행복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고통을 피하는 방법인 거죠.”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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