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열의 산썰(山說)] 19.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지 않습니다'…자연에서 체화하는 겸손의 미덕

최동열 2023. 12. 22.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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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봉정암 등산로에서 만나는 경구

 

 

▲ 설악산 백담사∼봉정암 코스를 등산하다 보면 등산로를 가로 질러 쓰러진 고목의 나뭇등걸에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지 않습니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지 않습니다.”

예전에 설악산 백담사에서 수렴동∼구곡담 계곡을 거쳐 적멸보궁 봉정암으로 등산하다가 이런 글귀를 만난 적이 있다. 등산로 길 위에 비스듬히 쓰러져 누워 고사한 고목의 나뭇등걸에 쓰여 있는 글귀였다.

거대한 나무 기둥이 깊은 산중의 등산로를 가로질러 걸쳐 있지만, 사실 사람들이 그 밑으로 지나다니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굳이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여유롭게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나뭇등걸 밑 공간은 넉넉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곳을 지나가면서 나무 밑 공간의 높이와 본인의 키를 가늠하면서 한 번쯤은 다들 몸을 움츠렸다. 지나가야 하는 길 위에 아름드리 고목이 걸쳐 있으니 부딪치지나 않을까, 썩은 나무가 갑자기 머리 위로 떨어지지나 않을까, 무심결에 한 번 더 나무 밑 공간을 살피는 것이 자연스러운 심리적 반응인 것이다. 그렇게 조심하면서 삼가고 살펴야 하는 장애물 지점에 절묘한 인생의 큰 가르침을 일깨우듯 철학적 경구가 새겨져 있으니 그 메시지가 더욱 강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지 않습니다.’ 설악산 백담사∼봉정암 등산로의 나뭇등걸에 쓰여 있는 글귀이다.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심오한 이 글귀는 사실 조선조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던 맹사성의 일화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1360∼1438년). 고려 말에 태어나 조선 태종·세종대에 활약한 문신으로, 소박한 삶을 실천한 청백리로 더욱 유명한 인물이다. 그 맹사성이 이십대 약관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한 고을의 수장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젊은 나이에 남들이 우러르는 자리에 오르면서 자만으로 가득 차게 된 맹사성이 어느 날 고명한 선사를 찾아가 “고을을 다스리는데 최고의 덕목이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 설악산 백담사∼봉정암 코스를 등산하다 보면 등산로를 가로 질러 쓰러진 고목의 나뭇등걸에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지 않습니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선사의 대답이 걸작이다. “나쁜 일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많이 하면 된다.” 그 말을 들은 맹사성은 “그런 말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실망감을 표출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 했다. 그런 맹사성에게 “차(茶)나 한잔하고 가라”며 붙잡은 선사가 차를 따르는데, 찻잔에 물이 넘치도록 계속 따라 방바닥이 흥건해지자, 맹사성이 찻물이 넘치고 있다며 그만 따르라고 한다. 그때 맹사성을 향한 선사의 일갈. “찻잔의 물이 넘치는 것은 알면서도 알량한 지식의 자만이 넘쳐 스스로 인품을 망치는 것은 왜 모르는가?”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라 황급히 방을 나서던 맹사성이 문틀에 쿵 하고 머리를 세게 부딪치자 선사가 껄껄 웃으며 덧붙인 말이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다”였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맹사성은 그날 선사로부터 두 번의 깨우침을 받았다. 찻잔의 찻물이 넘치는 데서 한번, 머리를 방문 틀에 부딪치는 것으로 또 한 번. 전혀 예기치 않고, 의도하지 않았던 굴욕적 경험이 순간의 큰 깨달음으로 체화(體化) 했기에 그것은 평생 간직하는 가르침이 됐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맹사성은 ‘일인지상, 만인지하’, 재상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한평생 촌부마냥 소탈한 삶을 실천했고, 비천한 아랫사람에게도 예의를 잃지 않는 품행으로 우러름을 받았다.

사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지 않는다’는 글귀는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더욱 깊이 새겨야 하는 경구다. 부딪친다는 것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이나 다툼을 의미한다고 할 때, 오늘 우리 사회에는 부딪칠 일이 정말 많다.

▲ 설악산 백담사∼봉정암 코스 등산로에 쓰러져 있는 고목. 나뭇등걸 밑으로 등산로가 이어진다.

그중에서도 지위나 돈을 무기로, 시쳇말로 목에 힘을 준 채 다른 사람을 깔보고, 괴롭히고, 억압하는 행위는 이 시대에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경계해야 할 어리석은 자해 행위다. ‘갑(甲)’의 지위를 이용해 ‘을(乙)’을 무시하고, 괴롭히는 등 인간에 대한 예의를 깨는 충돌 행위를 일삼았다가 결국 본인 스스로 여론 재판이라는 화(禍)를 자초해 큰 손해를 보는 경우를 요즘 유난히 자주 목격하게 된다. 찻잔의 물이 넘치듯이 부(富)나 권력이 넘쳐 스스로의 인품을 망가뜨리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지 않는다는 경구를 묘약처럼 처방해야 하는 세상이 바로 요즘이다.

그런데, 산에 가면 고개를 숙여야 할 때가 참 많다.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걷다가는 나뭇가지에 찔리고 돌 계단에 부딪혀 상처를 입기 십상이니 등산하는 행위 자체가 자연이 전하는 진중한 가르침을 체화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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