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담은 소설, 1990년대 탐구서… ‘시대의 내면’ 을 읽다[북리뷰]

박동미 기자 2023. 12. 2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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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일보 북리뷰 필진들의 ‘PICK’ 15권
그래픽 = 권호영 기자

지난주 문화일보 북팀이 선정한 ‘2023 올해의 책’을 발표한 데에 이어, 이번에는 외부 필진 5인이 각자의 취향과 철학을 토대로 엄선한 ‘톱 3’, 총 15권을 풀어놓는다. 이른바 ‘이 책을 다시 한 번’. 그동안 북리뷰 지면을 통해 다채로운 책들을 소개해 온 이들이, 세밑에 이르러서도 잊지 못하고, 아니 세밑이라 더욱 선명하게 떠올린 책들엔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것은 어느새 ‘옛날이야기’가 돼버린 코로나19 시절을 소환하고, 끝을 몰랐던 그 긴 ‘절망’의 터널을 기억하고, 곱씹으라고 말한다. 또 문득 1990년대로 시간여행을 하게 하고, 독일 베를린으로, 열띤 시민운동과 최신 연구의 현장으로 우리를 데리고 다닌다. 그리하여 책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지, 그것은 또 나와 너, ‘지금, 우리’를 얼마나 더 이해하게 만드는지 일러주며 말이다. 번잡하고 달뜬 연말은 이제 재미없지 않은가. 지금 우리의 마음과 정신에 ‘맞춤’한 이 책들을 만나보는 건 어떨까. 침착하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아주 잠깐이라도 ‘몰입’의 순간을 맛볼 수 있다면, 2024년을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 더 풍요롭지 않을까.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 장은수 평론가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돌베개)는 한국 사회에 관한 고고학적 탐구다. 우리는 민주화 이후, 사회주의 붕괴 이후, 소비사회 이후, 경제 위기 이후, 정보화 이후에 속해 있고, 그 뿌리는 1990년대에 있다. 당대 잡지 1000여 종을 유물 삼아 읽어낸 1990년대는 욕망을 추구하고 문화를 경험할 수 있던 풍요의 시대이자 가족, 기업, 학교의 붕괴가 시작되는 시대다. 그 위기의 근원에서 이 책은 시대 정신을 고민하고 사회적 소명을 다하려 했던 당대의 분투를 파노라마처럼 펼쳐낸다.

‘갈대 속의 영원’(반비)은 책이 막 사라지려 하는 시대에 그 불가능성을 증언한다. 수천 년 동안 책은 권력의 힘, 시간의 폭력, 비극적 재난에 맞서 자신을 지켜냈다. 책에 담긴 불후의 언어, 한 줌의 공기 같은 말들로 쓰인 영원의 이야기가 그 불멸을 보증했다. 사람들은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고 어리석음에 지혜의 빛을 던지는 언어들을 위해 싸웠고, 앞으로도 그럴 테다.

‘힙합, 문학, 종교의 영혼을 찾아서’(이유출판)는 물신에 중독된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을 탐구한다. 영혼이다. 힙합은 현대인의 영적 탐구의 정수로, 인류의 오랜 영적 탐구 전통인 종교나 문학을 잇고 있다. 랩 음악엔 현대 물질문화의 파괴적 악령에 대항하는 힘이 있다. 세계에 경이를 느끼고, 진실을 탐구하며, 깊이를 추구하는 우리의 영적 움직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 하지현 정신의학전문의

사춘기가 시작된 중학생 딸을 둔 부모는 무척 난감해질 때가 많다. 친구들과 단단히 틀어져서 울고 있는데 들어보면 아주 사소한 일로 시작했고 가해자도 피해자도 분명하지 않다. 투명인간 대하듯 하는 미묘한 무시에 학교 가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현직 중학교 교사인 김미연의 ‘여학생이 사는 세계’(에듀니티)는 사춘기에 한껏 예민해진 10대 청소년 여성들의 심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제 내 몸을 돌아볼 시간이다. 노년내과 의사 정희원의 ‘당신도 느리게 나이들 수 있습니다’(더퀘스트)는 서서히 침몰하는 배가 되지 않으려면 중년부터 보험을 미리 들듯이 운동하고 근력을 늘려서 노쇠를 예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죽기 1년 전에 쓰는 의료비가 엄청난데, 근력이 유지되면 그 시기를 최대한 늦출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노년기 근육 1㎏의 가치가 1300만 원이라고 한다. 물론 지금 1300만 원을 들여도 1㎏을 늘리기 쉽지 않다.

마무리는 낙관과 희망을 주는 소설이다. 게임을 하면서 만난 세 명의 10대가 게임회사를 만들며, 우정과 연애, 썸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20여 년을 보여주는 가브리엘 제빈의 ‘내일 또 내일 또 내일’(문학동네)은 게임 세대를 위해 특화된 소설이다. 무한한 부활과 구원의 가능성, 플레이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길 것이라는 기대가 잘 녹아 있다. 읽고 나면 재미있는 게임을 클리어한 기분이 든다.

■ 장동석 평론가

‘우리의 상처가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동아시아)는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을 온몸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주민, 장애인, 아동, 여성 등의 상황을 세밀하게 추적, 재난이 소수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파고든다. 재난은 우리 앞에 어떤 방식으로 닥칠지 알 수 없다. 기억해야 하고, 그래야만 내일을 열어갈 수 있는 실마리를 풀어줄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는 말은 시대의 금언(金言)이지만, 말처럼 쉽게 이뤄지지는 않는다. 친일의 역사가 여전히 논쟁거리인 것은 그 명징한 사례다. ‘베를린이 역사를 기억하는 법’(푸른역사)의 저자는 ‘나치 과거사’와 ‘냉전 반세기’로 나누어 독일이 과거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을 추적한다. 우리는 어떤 지경에 있는가, 고민하는 독자라면 일독을 권한다. 베를린에 20년간 거주하며 직접 발로 누비며 받은 감흥을 적고 사진 찍는 방식이어서, 읽는 재미를 더한다.

한자는 가까운 듯 먼 문자다. 즐겨 사용하는 많은 단어가 한자어인데도, 그것이 어떤 원리나 방식으로 조합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한자의 풍경’(사계절)은 갑골문부터 금문, 전서, 예서, 해서, 간체자 등 한자의 기원부터, 그것에 담고자 했던 한자의 이상과 예술성을 동시에 살핀다. 말 그대로 한자를 통해 본 중국의 문명사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우주를 품고 있는 문자는 그 자체로 인류인데, 책은 그 미덕을 잘 보여준다.

■ 박연준 시인

제니 오델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필로우)은 “우리의 관심을 도구화하는 디지털 세계의 관심 경제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실제 세계의 시공간에 다시 연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쉬어도 쉰 것 같지 않고, 일을 할 때도 집중이 안 된다면, 너무 많은 정보에 노출되어 몸과 정신이 오염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면 이 책을 꼭 읽어봐야 한다. 곁에 두고 수시로 읽으면 좋을 책이다.

유진목 시인이 쓴 ‘슬픔을 아는 사람’(난다)엔 온전한 여행도, 온전한 쉼도 없다. 그런데 자꾸 읽고 싶고, 말없이 글 곁에 머물고 싶어진다. 이 책에서 시인은 빗속을 걸어가면서도 비를 모르는 사람처럼 보인다. 비를 등지고, 비에 머물고, 비를 떠나는 사람처럼 비를 맞는다. 슬픔에 빠진 사람이 여행으로 간신히 몸을 세울 때,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의욕’을 지켜보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이상하게 아름다운 책이다.

최은미 작가의 ‘마주’(창비)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국민이 불안하게 살던 시절의 한복판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소상공인이자 엄마이고, 불안정한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작가는 생활이 불안정할 때 인간이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지, 다수와 소수의 입장으로 선 위치가 갈릴 때 그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가족과 가족 바깥의 사람들이 스스로 그어놓은 경계를 넘나들 때 어떤 모습인지 집요하게 파헤친다.

■ 안희제 작가

어떤 문제를 다루거나, 어떤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할 때,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것을 관찰하는 방법이 ‘객관성’을 담보한다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거리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은 안전하고, 때로는 비겁하기까지 하다. 폐허가 되어가는 세상에서, 글쓰기는 드라이브가 아니다.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차단된 공간에서 창밖을 바라보듯이 세상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적극적으로 세상에 휘말리는 것, 즉 ‘연루’다. 세 권의 책은 장애, 빈곤, 그리고 지식과 연루되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

변재원의 ‘장애시민 불복종’(창비)은 ‘평범하고 착한’ 장애인이었던 저자가 진보적 장애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과 그로 인해 ‘시민’으로 변해가는 자신의 삶과 인식론을 담고 있다.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조문영이 엮은 ‘동자동, 당신이 살 권리’(글항아리)는 대학의 인류학 수업을 통해 대학생들이 빈곤과 반빈곤 운동의 현장에 접속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김연화, 성한아, 임소연, 장하원이 쓴 ‘겸손한 목격자들’(에디토리얼)은 네 명의 과학기술학자가 자신이 현장과 얽힌 방식을 상세히 보여줌으로써 지식을 생산하는 과정 자체를 성찰한다.

‘연루’는 나와 대상이 사실 언제나 이미 연결되어 서로를 바꾸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어떤 존재로 만들어 나갈 것인가? 이 세 권의 책에 힌트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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