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오진 날’ 유연석 “저기선 살리고, 여기선 죽이려니…”[스경X인터뷰]
대한민국에서 연기로 먹고사는 사람 중에 그만큼 넓은 이미지를 가진 배우가 또 있을까 싶다. 한때 ‘밀크남’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순정에 진심이었고, 순하고 따뜻한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상대에게 끊임없이 이죽거리고, 원하는 것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협잡꾼의 모습도 보인다.
배우 유연석은 최근 공개된 티빙의 오리지널 드라마 ‘운수 오진 날’을 통해 또 한 번 ‘멀리’ 갔다. 이번에는 악역의 끝이다. 그가 연기한 금혁수는 안 그래도 사회성과 감정공감이 결여된 캐릭터가 머리를 다친 후 뇌 기능의 이상으로 고통과 두려움을 모르게 된다. 그는 유일하게 살인과 그 희열에서만 삶의 의미를 찾는다. 끝 간데없는 사이코패스다.
“댓글을 봤는데 ‘얼굴을 갈아 끼우고 나왔다’ ‘눈빛이 돌았다’는 등의 리뷰가 있었어요. 그저 감사한 표현인 것 같아요. 저라는 배우에게서 그렇게 새로운 이미지를 보셨다는 느낌이 나서 재밌게 느꼈습니다.”
사실 유연석이 데뷔 후 악역을 안 했던 것은 아니다. 2012년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전국의 남성 관객들을 분노하게 한, 서연(수지)을 자취방으로 데리고 간 ‘압서방(압구정+서초+방배) 선배’ 역도 했고, 같은 해 영화 ‘늑대소년’에서는 순이(박보영)를 괴롭히는 황지태로 등장해 미움을 샀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밉상이었을 뿐 금혁수 같은 살인마는 아니었다.
“이렇게 악랄한 악역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원작 웹툰을 보고, 대본을 봤을 때 느꼈던 혁수의 설정들이 흥미로웠죠. 기존의 여러 의학물을 하면서 쌓았던 선하고 따뜻한 이미지에 비해 저 스스로는 강렬한 캐릭터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것 같아요. 걱정보다는 기대를 했습니다.”
제작발표회에서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금혁수의 심리상태는 유연석으로는 공감으로 따라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철저하게 스스로의 마음과 떼어놓고 캐릭터에 따라간다는 마음으로 촬영했다. 그 안에서 천진난만함을 많이 강조했다. 실제 사이코패스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죄책감을 못 느끼고, 마치 무용담을 늘어놓듯 놀이를 하듯 이야기한다는 점에 착안했다. 필감성 감독이 전율했다고 하는, 살인하고 앞차 블랙박스 카메라에 ‘브이’자를 그리는 애드리브는 그렇게 나왔다.
“복수심요?(웃음) 평소 운전할 때 뒤차가 1초도 안 기다리고 ‘빵빵’ 클랙슨을 울리면 화나기도 하죠. 하지만 단 한 번도 창문을 내린 적은 없었어요. 촬영할 때는 그런 캐릭터의 영향을 받을 여유는 없었던 것 같아요. 계속 밤에 촬영해서 바이오리듬이 좀 깨지긴 했지만, 신기하게도 안 좋은 꿈을 꾸거나 그러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가 말하는 ‘여유가 없다’는 부분은 촬영일정에서도 엿보인다. 총 10회 분량의 ‘운수 오진 날’에서 약 3, 4회 분량을 촬영할 때까지 유연석은 SBS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와 일정이 겹쳐 있었다. 날짜는 달랐지만, 차를 타고 달려가 한쪽에서는 ‘낭만닥터 김사부 3’의 강동주 역으로 사람을 살리고, 한쪽에서는 ‘운수 오진 날’의 금혁수로 사람들을 죽였다. 그 캐릭터의 괴리가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초반에는 그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저기 가서는 살리고, 여기서는 죽이니까요. 특히 ‘낭만닥터 김사부’는 의학용어로 대사가 많았고 특별출연이니까 제 촬영분량이 몰렸어요. 금혁수 캐릭터도 의학과 조금 연관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대사가 많았고요. 택시라는 한정된 공간이 주는 긴장감도 컸죠. 여러모로 도전이었어요.”
지금으로부터 딱 20년 전,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에서 유연석은 유지태가 연기한 이우진의 아역으로 데뷔했다. 당시 촬영장에서 어떻게 서있어야 하는지도 몰랐던 어린 유연석은 20년이 지난 후 이 작품의 무게감과 대단함을 다시 느낀다. 지금 유연석이 서른아홉, ‘올드보이’ 촬영 때의 최민식이 마흔. 딱 유연석의 지금 나이다.
“그때의 분들이 다 ‘레전드’가 되신 거잖아요. ‘카지노’ ‘헤어질 결심’ 그런 작품들을 보면 정말 대단한 분들과 작업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제가 ‘올드보이’를 한다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죠.”
그래서 유연석에게는 지금의 행보에 더욱 더 힘을 붙일 필요가 있다. 데뷔 때부터 선 굵은 외모라던지, 강렬한 이미지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하얀 도화지처럼 여러 캐릭터를 그릴 수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악역을 하다가 ‘칠봉이’ 같은 순정남 캐릭터로 크게 방향을 틀었고, ‘슬기로운 의사생활’ ‘낭만닥터 김사부’를 하다가도 이렇게 금혁수로 크게 유턴할 수 있었다.
“저도 이번에 함께 한 이성민, 이정은 선배님을 비롯해 과거 함께 했던 선배님들처럼 인간적으로나 배우로서나 배울 부분이 있는 선배가 되고 싶어요. 후배가 마음껏 연기를 펼치는 판을 조성해주시고, 스태프와 주변을 챙기면서도 본인의 캐릭터를 구축하는 모습요. 지금까지 해 나온 대로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하경헌 기자 azima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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