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보수의 소멸

한겨레 2023. 12. 22.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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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윤재옥 국민의힘 당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와 한동훈 법무부 장관 등이 지난 6일 국회 예결위원회 회의장에서 열린 국민의힘 정책의원총회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서복경 | 더가능연구소 대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 지명되었다. 일명 ‘김건희 특검법’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하다. 2023년 연말, 나는 우리나라 오래된 보수의 시끄럽지만 에피소드 같은 소멸을 지켜보는 중이다.

에피소드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로, 그리스 비극에서 2개의 곡 사이에 삽입된 소재라는 뜻이란다. 하나의 완결된 곡과 다른 하나의 완결된 곡 사이에 놓인 무엇. 심리학에서 에피소드란 관계된 특정한 날짜나 장소에 연결되어 개인에게 주관적으로 투영된 기억이라고 한다. 지금 현 정부와 집권당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은 말뜻 그대로 에피소드 같다. 한국의 오래된 보수가 수명을 다하고 또 다른 보수가 생성되는 사이에 놓인 정체불명의 무엇처럼 느껴지거나, 한국 보수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기억들을 툭툭 떠올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정부와 집권당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혹자는 ‘극우’라고 한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정치적 스펙트럼의 오른쪽 끝에 있는 이념이나 신념을 지지하는 집단이라는 뜻이다. 확실히 이 정부는 뜬금없을 만큼 극우적인 발상이나 행동을 한다. 주 69시간 노동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그 행동이 ‘극우’적 신념에 기반해서 나온 걸까? 아닌 것 같다. 이념이나 신념을 가진 집단이라면 최소한 핵심 정책 영역에서는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 정부는 맥락 없이 옛 주장들을 소환한다는 점에서 일관성은 있지만 정치적 신념으로서 일관성을 보여준 적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지 못한다. 어떤 이념이나 신념에 기반한 행동이 아니라는 증거다.

혹자는 이 정부의 행태를 ‘포퓰리즘’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도 아닌 것 같다. 어떤 행위나 생각을 ‘포퓰리즘’으로 정의하려면, 정치적 경쟁 상대를 이기기 위해 법규범을 무시한 채 대중의 지지를 동원하여 공격해야 한다. 이 정부는 정치적 경쟁 상대를 이기려는 목적의식이 있고 법규범을 무시하는 행태도 보이지만, 그 수단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과 그 친구들은 집권당 내 정적을 제거하거나 제1야당 대표를 제거하기 위한 일관된 행동을 해왔는데, 그 과정에서 굳이 여론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지지가 있든 없든 그냥 하는 거다.

굳이 이 정부의 정체성을 찾자면 과거다. 민주화 이후 지난 35년의 기억을 돌이켜보더라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그 이전의 과거. 2023년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시민에게 기억에서조차 잊힌 오래된 것들만 소환해 버무려놓은 것 같다. 예컨대 ‘김건희 특검법’을 거부하겠다는 발상 같은 것들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이명박 전 대통령의 형은 모두 대통령 임기 중 검찰 수사가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구속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가족은 아니지만 친구 비리 때문에 결국 대통령직을 잃었다. 민주화 이후 역대 어떤 대통령도 여론의 비난 앞에서 가족 비리를 덮을 수 있다는 발상은 하지 못했다. 굳이 찾자면 박정희 유신 체제와 전두환 신군부 체제에서나 가능했을 발상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대통령 측근을 내세워 집권당을 장악하려는 행태도 그렇다.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은 쿠데타로 집권한 후 집권당을 스스로 만들었지만, 그 이후 어떤 대통령도 측근에 의한 당 장악에 성공하지 못했다. 민자당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가 되는 과정에서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이 몰락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랬다. 하지만 이번엔 성공할 모양이다. 집권당인 국민의힘이 그만큼 허약하다는 증거다.

우리나라의 오래된 보수는 반공주의에 기반했지만 시대가 변해 노태우 정부가 중국·소련과 수교했고, 권위주의 체제에서부터 오래 행정을 관리해온 경험이 있어 ‘관료 통제에 능숙하다’고 했지만 박근혜 정부에서 무너졌고, ‘그래도 경제는 잘한다, 외교는 잘한다’고 했지만 윤석열 정부에서 이 모든 평판이 무너져 내렸다. 마지막 남은 보수의 정체성이 기득 이익의 대변인데, 그조차도 변변히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윤석열 정부 때문에 국민의힘이 무너지고 있는 게 아니라, 국민의힘이 이미 무너졌기 때문에 윤석열 정부가 저러고 있는 거다. 2024년에는 좀 다른 보수의 등장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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