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감독’이 주도하는 동남아 축구 르네상스 [경기장의 안과 밖]

배진경 2023. 12. 22.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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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 감독의 성공 이후 동남아 축구계에서는 한국 지도자에 대한 기대가 높다. 김판곤, 신태용 등 적지 않은 한국 출신 감독들이 여러 나라에서 활약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축구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김판곤 감독(왼쪽)은 월드컵 예선에서 이변을 일으켰다. ⓒEPA

11월 아시아 축구는 2026 북중미월드컵(미국·캐나다·멕시코 개최)으로 향하는 항해를 시작했다. 국제축구연맹(FIFA) A매치 주간에 치러진 월드컵 2차 예선은 한국을 비롯해 일본·이란·사우디아라비아·오스트레일리아 등 아시아 내 강자들이 본격적으로 참가하는 무대였다. 한국은 싱가포르와 중국을 가볍게 누르며 2연승을 달렸다. 다른 강호들의 위력도 여전했다.

그런 가운데 D조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FIFA 랭킹 137위인 말레이시아가 97위의 키르기스스탄을 상대해 4-3으로 승리했다. 말레이시아는 기세를 몰아 타이완 원정에서도 승리했다. D조 최강자로 여겨지던 오만이 2차전에서 키르기스스탄에 패하며 말레이시아는 조 1위로 올라섰다. 말레이시아의 키르기스스탄전 승리는 드라마 그 자체였다. 전반 7분 선제골에 성공했지만 이후 내리 3실점했다. FIFA 랭킹 40계단 차이를 보여주는 흐름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대반전의 서막일 뿐이었다. 말레이시아는 후반 27분 상대 자책으로 추격의 발판을 마련하더니 5분 뒤 동점골을 만들었다. 후반 추가시간에는 총공세를 펼쳤다. 파이살 하림의 슈팅으로 역전 결승골을 뽑아냈다. 가히 아시아 2차 예선 최고의 승부였다.

그 중심에 한국인 감독 김판곤이 있었다. 하프타임에 강력한 카리스마로 선수들의 팀 정신을 일깨운 그는 후반에 공격적인 교체를 통해 말레이시아 축구사에 길이 남을 대역전승을 썼다. 말레이시아 언론은 일제히 ‘김판곤 매직’을 칭송했다. “불굴의 의지를 보여줬다. 실수를 해도 전진하는 모습을 보였다”라고 평가했다. 2차 예선 6경기에서 승점 12점을 목표로 삼은 말레이시아는 2경기 만에 그 절반을 획득했다.

김판곤은 국내 팬들에게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2017년 대한축구협회(KFA) 국가대표 전력강화위원장(부회장 겸임)에 취임하며 행정가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2022 카타르월드컵 16강을 이끈 파울루 벤투 감독 선임을 그가 주도했다. 김 감독은 동시에 오랜 기간 현장에 몸담은 지도자이기도 하다. 국내에선 무명에 가까웠지만, 2009년 홍콩 대표팀 감독에 취임해 대대적인 변화를 이끈 것으로 화제를 모았다. 당시 홍콩에서 보여준 결과물이 그를 대한축구협회로 이끈 셈이었다.

2022년 1월 말레이시아 축구협회의 구애를 받은 그는 KFA에서의 직함을 내려놓고 한국을 떠났다. 지도자로 복귀한 말레이시아에서는 긍정적인 변화와 빠른 성장을 이끄는 리더십을 선보이고 있다. 2022년 말 열린 동남아 축구연맹 선수권(미쓰비시컵, 전 스즈키컵) 4강 진출을 시작으로 2023 아시안컵 본선 진출, 그리고 월드컵 2차 예선의 돌풍까지 거침없는 행보였다. 혹자는 그를 보며 베트남에서 열풍을 일으킨 박항서 감독을 떠올린다. 김판곤 감독은 “말레이시아로 오면서 박항서 감독님의 성공 요인을 분석하고 참고했다. 이곳만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내가 지향하는 축구를 입히겠다고 다짐했다”라고 말했다. 최근의 상승기류에 고무된 말레이시아 축구협회는 김판곤 감독과 계약기간을 2년 더 연장했다.

김판곤 감독 이전에는 인도네시아의 분위기가 비슷했다. 신태용 감독이 축구 한류의 물꼬를 튼 상태였다. 2019년 12월 인도네시아 A대표팀과 연령별 대표팀을 총지휘하는 자리에 오른 그는 2020년 스즈키컵 결승에 진출하며 지도력을 증명했다. 박항서 감독의 베트남과 조별리그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두 한국 감독의 라이벌전은 동남아를 넘어 한국에서도 큰 관심사였다. 신태용 감독은 인도네시아 축구협회는 물론 정부에서도 높은 신뢰를 받고 있다.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광고에 잇달아 출연할 정도로 인지도가 높다.

동남아 내 축구 한류의 원조는 역시 박항서 감독이다. 베트남 무대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일약 국민 영웅이 되었다. 23세 이하 아시안컵 준우승, 아시안게임 4강 진출, A대표팀의 아시안컵 8강 진출, 월드컵 최종예선 진출 등 베트남 축구가 일찍이 가보지 못한 높은 자리까지 단숨에 뛰어올랐다. 그의 마법 같은 지도력에 베트남이 열광했다. 응우옌쑤언푹 전 주석은 그를 ‘가장 신뢰하는 외국인’으로 꼽았다. 한국 정부가 베트남과 관련된 국가 행사를 치를 때마다 박항서 감독이 등장한 배경이다.

재임 기간이 찬란했던 만큼 대표팀 사령탑에서 물러날 때도 베트남 국민들의 반대 여론과 저항이 컸다. “국부 호찌민 다음가는 위상”이라는 찬사가 나올 정도였으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2023년 1월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난 뒤 베트남 유소년 축구 교육사업과 국내에서 방송 활동 등을 이어가고 있는 박항서 감독은 여전히 아시아권에서 인기가 높은 지도자다. 베트남 주변국 대표팀과 프로팀에서 차기 감독 후보로 빠짐없이 언급된다. 최근에는 월드컵 2차 예선에서 한국에 5-0으로 크게 패한 싱가포르 대표팀 감독 후보로 거론됐다. 같은 조의 중국과 타이가 주시하는 분위기다.

늘어난 월드컵 본선 티켓이 목표

동남아 국가들은 정치·안보·경제·문화 각 방면에서 치열하게 경쟁한다. 한 나라의 성공은 곧 다른 나라들의 질투와 추격으로 이어진다. 축구는 동남아 지역을 관통하는 중요한 이슈 중 하나다. 2년에 한 번 열리는 아세안 축구대항전 ‘동남아축구연맹 선수권’에 일본 대기업이 오랜 시간 거액의 메인 스폰서 계약을 체결하는 이유다. 하이트진로를 비롯한 한국 기업들도 최근 스폰서로 합류하는 결정을 내렸다. 축구로 파생되는 거대한 효과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축구 한류는 대표팀뿐만 아니라 클럽 축구에도 이식되고 있다. 지금은 물러났지만, 김도훈 감독이 싱가포르의 슈퍼클럽인 라이언시티 세일러스를 이끌었다. 베트남 대표팀 코치로 박항서 감독을 보좌했던 지도자 공오균은 최근 베트남 V리그 디펜딩 챔피언인 하노이 콩안 FC 사령탑이 되었다. 홍콩의 최강팀 킷치 SC에는 1982년생 젊은 지도자 김동진이 있다. 현역 시절 ‘황금날개’로 불리며 이영표의 뒤를 잇는 대표팀 레프트백으로 활약했던 그는 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킷치에서 찍고 곧바로 지도자로 전환했다. 구단주의 높은 신뢰 속에 킷치 SC 수석코치로 출발했고, 현재 감독대행으로 활약 중이다.

아시아 축구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고 있다. 동남아와 서남아 축구가 도약대에 서면서 기존 강호들이 구축한 판도가 깨지고 있다. 특히 클럽 축구에서는 동남아의 슈퍼 클럽들이 한국·일본·중국 명문 팀들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엄청난 몸값의 외국인 선수 영입으로 전력 향상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눈에 띄는 사례가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이라는 별명으로 막강 권력을 발휘하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주도 아래 자국 리그의 규모를 급성장시켰다. 호날두, 벤제마, 캉테, 네이마르 등 슈퍼스타가 모여들며 아시아 축구에 새로운 자극을 주고 있다.

이런 가운데 차기 월드컵은 기존 32개국 체제에서 48개국 체제로 개편된다. 아시아 축구에 배정되는 출전권이 4.5장에서 8.5장으로 늘어난다. 중국, 인도 등 엄청난 인구를 등에 업은 아시아의 시장성을 두고 FIFA가 계산기를 두드린 결과다. 이것은 베트남·타이·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 발톱을 세우고 있는 동남아 국가들에게도 희망의 이정표가 됐다. 먼 나라 이야기였던 월드컵 본선행을 꿈꾸기 시작했다.

박항서 감독 이후 동남아를 무대로 꾸준히 초청받고 있는 한국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미션은 분명하다. 꿈의 현실화다. 한국은 오랜 기간에 걸쳐 신체 조건상 열세를 극복하고 팀워크와 희생을 미덕으로 삼는 문화를 통해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키워왔다. 이런 에너지가 ‘레벨 업’을 기대하는 동남아 축구와 궁합이 잘 맞는다는 평가가 있다. 축구 한류 2.0을 향해 도전하는 새 지도자들이 동남아 축구의 르네상스를 주도하고 있다.

배진경 (<온사이드> 편집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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