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대접받지 못한 이를 대접하는 ‘뒷전’ [여여한 독서]
황루시 지음
지식의날개 펴냄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에는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책을 선정해 발표한다. 하지만 나는 올해의 책을 뽑는 대신 이 지면에서 다루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쓰지 못한 책을 소개하련다.
첫 책은 황루시의 〈뒷전의 주인공〉이다. 얼핏 봤을 땐 ‘뒷간의 주인공’인 줄 알았다. 뒷전이라면 흔히 ‘○○는 뒷전이고’ 하는 식으로만 썼지 이리 떡하니 앞으로 내세운 건 처음 봤다. 도대체 뒷전이 뭐지? 들어가는 글에서 친절하게 설명한다. 뒷전이란 굿판에서 “가장 마지막에 하는 굿”으로, “무속이 신앙하는 여러 신을 대접한 뒤에 철상을 하고 굿청 밖으로 나와 떠도는 잡귀 잡신들을 풀어먹이는 의례”라 한다. 아하, 한데 굿에서 쓰는 말이 어쩌다 사람들이 흔히 쓰는 관용어가 됐을까? 뒷전에 어떤 의미가 담겼기에?
황루시는 마당굿과 무속문화 연구로 일가를 이룬 민속학자다. 사오십 년 전, 근대화의 기치 아래 폄훼되던 마당굿, 마당놀이가 민족문화의 본류로 새롭게 조명되던 시절이 있었다. 황루시는 전통문화의 르네상스라 할 그 시대를 이끈 이들 중 하나로, 〈뒷전의 주인공〉은 그가 오랜만에 펴낸 대중용 교양서다. 책은 300쪽이 채 안 되는 문고본인데 이 얇은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뒷전이 돼버린 옛 시절이 떠오른다. 그래, 한때는 우리에게 이런 정서 이런 문화가 있었는데, 이런 것을 기리던 시절이 있었는데, 불과 한 세대 만에 모든 게 옛일이 되었구나, 새삼스러운 감회가 사무친다.
굿은 특정한 신에게 복을 빌고 액을 물리치는 의례다. 이사를 가면 집을 지키는 성주신에게 성주받이를 하고 병이 나면 칠성에 무병장수를 비는 식으로 각각의 영역을 관장하는 신에게 원하는 바를 얻고자 굿을 했다. 한 개인, 한 집안뿐 아니라 예전에는 한 마을이 하나가 돼 굿을 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집집마다 추렴해서 쌀과 돈을 모아 마을의 부정을 쫓고 한 해의 안녕을 비는 당굿을 했다. 책에는 당굿의 현장이 생생히 실렸는데 그 정성이 놀랄 만큼 지극하다.
일례로 지금은 사라진 답십리 도당굿의 경우, 제관을 정하는 절차부터 엄숙하다. 음력 시월 초하루 새벽 세 시에 그해의 제관을 정하면 신의 뜻에 따라 소임을 맡은 이들을 중심으로 온 마을 사람이 굿을 준비한다. 굿은 저녁부터 시작해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진다. 무당이 거리부정을 쳐서 마을을 신성한 공간으로 만들고, 그곳에서 엄숙한 제사가 치러진 뒤 한바탕 신명 나는 굿판이 벌어진다. 굿판에서는 평소 점잔 빼던 남성들도, 얌전스럽던 동네 아주머니, 할머니도 네 활개를 치며 숨이 턱에 닿도록 춤을 춘다. 그렇게 밤새 이어진 굿의 끝은 뒷전이다. 무녀가 여러 잡신을 청한 뒤 지신할머니와 장님을 불러 놀고 마지막 순간 칼을 던진다. 칼끝이 밖을 향하면 잡신들이 만족했다는 표시다. 굿이 잘된 것이니 모두가 흐뭇하게 집으로 돌아간다.
이 도당굿을 추억하는 대목을 읽다가 나는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는데, 다시 오지 않을 그 시절이 너무나 그리워서였다. 사실 내가 경험하지도 못한 시절을 그린다는 게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지만, 향수는 유토피아만큼 오래된 사람의 본래적 정서이니 이상할 것도 없다. 유토피아는 미래를 지향하고 향수는 과거를 바라보지만 유토피아는 또한 과거의 기억, 노스탤지어에서 발원하는 것이므로 둘은 다르되 비슷하며 둘이되 하나이기도 하다.
내가 보지도 못한 도당굿에 향수를 느낀 것은 지금은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마을 공동체 때문이다. 물론 공동체라고 늘 다습고 평화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안에도 계급과 성, 가문과 이웃 간의 차별과 알력이 있는 줄 왜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서로가 함께해야 한다고 믿는 정서에는 오늘날 사적 권리란 이름으로 잃어버린 공공성과 배려가 있다. 살아서 대접받지 못한 잡귀를 대접하는 뒷전이 바로 그 증거다. 소외된 죽음들을 기억하고 한을 풀어주려는 마음, 함께 더불어 살려는 마음이 뒷전을 이루었으니, 〈뒷전의 주인공〉은 이제는 잊힌 그 마음을 일깨우는 드문 기록이다.
버리고 얻은 자유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가 연주한 슈만과 슈베르트를 듣다가 이 피아니스트에 관심이 생겼다. 덴마크 음악가 카를 오게 라스무센의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피아니스트〉(이석호 옮김, 2022)가 눈에 띄었다. 유려한 문장으로 쓴 충실한 평전이다.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맞고서도 “전 싸울 수 없어요. 전 아주 다른 종류의 아이라고요” 하고 말했다는 유년기의 에피소드가 이 특별한 음악가를 보여주는 듯하다. 재미있게 읽히지만 방대한 분량 탓에 완독은 다음으로.
브뤼노 몽생종이 쓴 〈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이세욱 옮김, 2005)은 한국처럼 책 수명이 짧은 출판시장에서는 보기 드문 스테디셀러다. 리흐테르를 인터뷰해 회고록처럼 썼는데 글쓴이가 브뤼노 몽생종이라니 안 읽을 수가 없다. 몽생종이 쓴 〈음악가의 음악가 나디아 블랑제〉의 감동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수첩〉을 읽고 그가 만든 리흐테르에 관한 다큐멘터리 ‘에니그마(수수께끼)’도 보았다. 몽생종은 구순의 블랑제에게서 진실한 소리를 끌어내었듯, 은둔자로 알려진 리흐테르를 카메라 앞에 세워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게 하는데, 그 울림이 길고 깊다.
젊은 시절 폭풍 같은 연주를 하던 리흐테르가 나이 들어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음색을 내는 모습은 세월이 모든 것을 앗아가지는 않는구나 싶어 묘한 안도감을 준다. 물론 그저 나이만 먹어서 이룬 것은 아니다. “나는 스스로를 안에 가둠으로써 자유를 얻었다”라는 그의 말처럼 일상의 여러 즐거움을 버리고 얻은 경지다. 텅 빈 계절, 리흐테르가 연주하는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를 듣는다. 겨울은 모든 것을 버릴 때, 안달하지도 아쉬워하지도 말자는 마음이 새순처럼 돋는다.
김이경 (작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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