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기꺼이 ‘불편한 존재’가 됐을 때 보이는 세상

양선아 2023. 12. 22.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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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고정관념·불평등 지적하면
예민하고 성가신 존재로 낙인
실천적 독립연구자 사라 아메드가 제시하는 생존법
yoihoi50@hani.co.kr, 게티이미지 뱅크

페미니스트 킬조이
쉽게 웃어넘기지 않는 이들을 위한 서바이벌 가이드
사라 아메드 지음, 김다봄 옮김 l 아르테 l 3만2000원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2018년 ‘미투’ 운동을 거치면서 더 많은 여성이 ‘페미니즘’이라는 렌즈를 통해 한국 사회의 젠더 불평등을 명료하게 인식하게 됐다. 그 결과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용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페미니즘은 최근 한국 사회의 변화를 부추기는 한 축이 됐다. 그러나 거대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이에 반발하는 흐름 또한 강해진 것도 사실이다. 남초 커뮤니티에서 극단적인 여성혐오 발언이 쏟아지는가 하면 일부 남성들은 ‘페미니즘=남혐’이라는 비뚤어진 시각으로 페미니스트들을 공격하고 위협한다. 또 남성 이용자들을 주요 고객으로 하는 게임업체들은 일부 남성들의 잘못된 시각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채용 면접 등에서 ‘페미 사상 검증’까지 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최근 여성들 사이에서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거나 페미니즘에 관심 있다는 이유로 채용 등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칫 주춤하고 실천의 의지가 꺾일 수 있는 여성들에게 ‘페미니즘 배터리’를 고속으로 충전시켜줄 만한 책이 나왔다. 바로 페미니스트 철학자이며 실천적 활동가인 사라 아메드의 ‘페미니스트 킬조이’라는 책이다.

‘킬조이’(killjoy)를 그대로 해석하면 ‘기쁨을 죽이다’란 의미다. 의역하면 ‘파티의 흥을 깨는 사람’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 ‘산통을 깨는 사람’ 정도가 되겠다. ‘페미니스트 킬조이’라고 하면 페미니즘과 관련된 말이나 행동으로 분위기를 깨는 사람을 지칭하게 될 텐데, 사라 아메드는 이 책을 통해 페미니스트를 조롱하거나 불편해하는 사람들에게서 이 단어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평소 일상에서 ‘페미니스트 킬조이’라고 불리던 저자는 되레 자신이 이 단어를 언급하면서 대중에게 기꺼이 ‘페미니스트 킬조이’가 되자고 제안한다. 저자는 ‘페미니스트 킬조이가 되는 것=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는 새로운 공식을 내세워 이 표현 속에 들어 있는 부정성을 긍정성으로 변환해버린다. 이 얼마나 저돌적이며 능동적이며 발칙한 발상인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페미니스트들이 젠더 불평등에 기초한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나 기쁨을 와장창 깨버려도 괜찮다고 용기를 준다는 점에 있다. 성고정관념적인 용어를 지적하거나 평등하고 공정하지 않은 상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은 흔히 ‘예민한 사람’ ‘성가신 사람’ ‘센 여자’ ‘불편한 사람’으로 취급된다.

책에서 대표적인 예로 든 것처럼 행복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가족 중 누군가가 “아기들에게 젖이 필요하니 여자들은 동등해질 수가 없어”라고 말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페미니스트라면 그 발언이 성차별적 발언이라고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순간 식사 자리는 싸해지면서 그 말을 한 당사자는 ‘저녁 식사 분위기를 망친 사람’이 되고 만다. 문제를 지적했는데 되레 자신이 문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페미니스트들이 만나게 되는 모순적 상황들을 공유하면서 “페미니스트 킬조이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 기꺼이 불행을 초래한다는 의미라면” 의지를 갖고 그렇게 하자고 말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려는 ‘의도’가 아니라, 성차별이나 인종차별주의에 관해 이야기할 ‘의지’가 있는 것이라고 해설하면서 말이다. 어떤 것을 할 때 접근 동기를 갖느냐 회피 동기를 갖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지차이가 난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페미니스트 킬조이’를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프로젝트로 접근한다면, 여성들이 되레 ‘페미니스트 킬조이’가 되는 상황을 즐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저자 사라 아메드. 아르테 제공

책은 또 다양한 영화나 소설 등에서 ‘페미니스트 킬조이’가 등장하는 사례들을 설명하며 페미니즘 관점으로 어떻게 문화비평을 할지도 충분히 보여준다. 독자는 작가의 번뜩이고 재치 있는 해석에 고개를 끄덕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만나는 영화나 소설 등을 페미니즘 관점으로 어떻게 볼지에 대한 힌트도 얻을 수 있다.

이 책은 강렬한 빨간색 표지뿐만 아니라 독특한 편집도 눈에 띈다. 저자의 경험을 응축해 놓은 ‘킬조이 진실’ ‘킬조이 격언’ ‘킬조이 다짐’ ‘킬조이 등식’은 검정 박스에 하얀 글씨로 새겨져 있는데 본문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마지막에 쭉 모아서 한꺼번에 보여준다. 이 내용만 쭉 훑어봐도 독자는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우습지 않을 때는 웃지 마라!” “다른 이들이 뒤따를 수 있게 ‘싫다’(No)라고 내뱉으라!” “괴물이 되라” “이 세상과 불화하라!”라는 격언은 촌철살인의 지혜를 담고 있다. “나는 행복을 명분으로 삼지 않겠다”는 다짐이나 “다른 이들에게 해를 입히는 유대는 부러뜨리겠다”는 다짐에서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페미니스트로서 생존하겠다는 저자의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이 책을 편집한 김지영 편집자는 “원서의 강조 요소들을 국내판으로 충실히 옮기기 위해 이탤릭 요소는 밑줄로, 볼드 또는 대문자 요소는 검정 박스로 옮겼다”고 설명했다. 그는 “‘강조 요소들’이 우리가 킬조이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게 하고, 그러면서 몸에 ‘새겨지는’ 과정들을 겪게 한다”며 “페미니스트 킬조이라는 표현이 한국 대중들에게 더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원문 그대로 제목으로 썼다”고 말했다.

사라 아메드는 레즈비언이자, 파키스탄계 무슬림 아버지와 백인 기독교 어머니를 두고 어린 시절 영국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한 경험을 지닌 유색인 여성이다. 그는 교차성(여성, 퀴어, 유색인, 이주민)을 연구해 자기 경험이 녹아든 실천적 글쓰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연구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책에서는 페미니즘 내부에서의 백인 중심주의를 지적하는 등 저자가 페미니즘 내부에서 ‘킬조이’가 되는 상황도 공유된다. ‘감정의 문화정치’ ‘정동이론’ ‘행복의 약속’ 등 학술서를 써온 저자가 지난 10월 처음으로 대중서를 내놓았는데 한국에서 이 따끈따끈한 책을 지금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일이다. 그의 지침을 발판 삼아 새해에는 ‘페미니스트 킬조이 프로젝트’를 실행해보는 것은 어떨까.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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