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세밑, 마흔살 시인의 이토록 투명한 청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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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인의 '청승'은 작심한 것이다.
연하 동년배 시인 가운데 이처럼 평이한 언어로 장난 가득 풀 먹인 시를 지은 이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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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모 네모 청설모
민구 지음 l 현대문학 l 1만원
이 시인의 ‘청승’은 작심한 것이다. 연하 동년배 시인 가운데 이처럼 평이한 언어로 장난 가득 풀 먹인 시를 지은 이가 있을까. 쉽게 쓰인 시라는 말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일상과 자존을 애면글면 해체해가며 울 바엔 웃겠다는 결심 같다. 비애도 이렇게 투명해진다.
“당신은 쉽게 사랑에 빠진다// 너무 쉽게 마음을 주고/ 너무 쉽게 나를 가져간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해서/ 뒤를 돌아본다// 뒤에는 사랑받는 사람이 서 있고/ 나의 커다란 의심이 서 있고/ 당신이 타고 온 택시가 서 있다// 택시는 시동을 끄고서 기다린다/ 당신이 다음 사랑에 빠질 때까지/ 다음 사람과 이 거지 같은 해변으로 돌아올 때까지//…// 내 앞에는 떠나버린 사람이 있고/ 여전히 커다란 의심이 있고/ 단물이 빠질 때를 알고 기다리는// 모범택시가 한 대 서 있다”(‘간조’ 부분)
빠져나가는 것들로 슬픈 자리엔 추억이 밀려온다. 소싯적 아마도 불량 청소년에게 가방을 털린 기억(이들은 “엄마가 먹을 서울우유”를 뺏어간다, ‘송림동’), 아마도 고정적 돈벌이가 필요할 터 일요일도 일해야 하는 처지(하필 헤어진 애인도 이날 연락해 온다,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겠다고”, ‘일요일’), 출발에 대한 “기억”은 죄 “나쁜 쪽으로 가려고 해” 친구 결혼 축시조차 막막해지는 2009년 신춘문예 등단 시인의 처지(정작 신부에게 써줄 기회는 없었다, ‘축시 쓰기’), “코끼리가 산다”는 듯한 위층이 조용해지자 되레 염려되는 소시민의 일상(‘층간 소음’) 등등.
하지만 시인은 새해에도 달력을 건다. “좋은 일이 쌓이면/ 달력에 살이 붙어서/ 날짜 하나가 툭 떨어지고// 너는 그날의 약속을 잊어버리겠지// 그날의 불길한 예감을/ 가볍게 거스르겠지”만서도 결심(‘새해’)하는 것이다. 행복을 또 작정해보는 것이다.
“행복하니까 할 이야기가 없다/ 밥을 굶어도 좋다//…// 꿈에서 은사님을 만났다/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내 따귀를 때렸다// (거기서 행복하시냐는 말로 들은 걸까)// 살아 계실 때 선생님이 그랬다/ 시인은 불행하다고/ 그림자가 없다고//…// 밀고 나가서 쓸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 불행은 내게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며/ 너는 과거에도 그랬다고/ 타이르는데// 행복해서// 남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행복’ 부분)
말미 덧붙인 에세이에서 자신의 별명 얘기로 독자를 한번 더 뒤집는 시인의 이름은 민구(40). 시인은 “나는 시를 쓴다. …시가 되지 못한 부속들을 그저 주워 담는 게 내 한계임을 알고 있다. 흔히 한계를 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이 벽에 기대서 오랫동안 따뜻했다”며 자신을 “벼멸구”라고 불러도 괜찮을 친구-아마도 독자-를 기다린다고 썼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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