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소설로 끄집어낸 4·3…뒤따른 고문과 수형
올해 최고령 대산문학상 수상
현기영의 첫 소설 ‘순이삼촌’
군사반란 2달 전 보안사 끌려가
나는 1975년에 신춘문예를 통해 뒤늦게 문단에 나왔다. 오랫동안 서구지향의 미의식에 사로잡혀 미망 속을 헤매던 나는 문단에 데뷔하고 나서야 비로소 문학의 사회적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유신정권이라는 혹독한 압제의 정치 현실이 나를 오히려 그렇게 각성시켜 주었던 것이다. 내 고향 제주의 4·3사건에 대해 예의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4·3은 역대 독재정권들이 그 내막을 발설 못 하게 금기로 묶어 놓은 한국 현대사의 무서운 비밀이었다. 군 토벌대에 의해 양민 약 3만명이 학살당하고, 130여개의 크고 작은 마을들이 소각된 사건이었다.
4·3사건의 생존자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나 역시 (어린 나이에 그 사건을 겪었지만) 내면에 맺혀 있는 억압의 옭매듭, 즉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다. 작가로서 글을 쓰려면 무엇보다 내면 억압의 해방이 중요했다. 문학은 자유 혹은 해방과 같은 말이 아닌가. 4·3의 억압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풀지 않고서는 문학적으로 단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4·3을 소재로 소설을 쓰게 되었다. 독자들은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느냐고 놀라워했지만, 그것은 ‘용기’ 이전의 문제였다. 고발해야 된다는 사명감이 아니라, 발설하지 않고서는, 내면에 틀어박힌 4·3의 억압을 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으므로, 그것은 말하자면 운명이 시킨 것이라고 하겠다.
4·3을 작품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취재의 난관을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때 시점에서 4·3은 30년 전의 사건이었는데, 그때의 나에게 그 ‘30년’이란 가늠하기 어려운 먼 과거였고, 그 먼 과거 속의 3만 죽음 또한 실감으로 와 닿지 않는 추상적인 숫자처럼 보였다. 그 숫자는 당시 도민 총인구의 9분의 1에 해당된다. 그 막연한 추상을 깨기 위해서, 3만이란 추상적인 숫자에서 구체적인 개별적 죽음들의 피와 살과 비명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현장 재현 작업이 필요했다. 그것은 죽은 자들을 다시 한 번 살려 내어 그 비극의 현장에 재투입하는 일이었다.
서울에서 고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나는 2년간 방학 때마다 고향에 내려가 취재에 몰두하곤 했는데, 증언자들이 좀처럼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아 여간 애를 먹은 게 아니었다. 친척들마저 왜 아픈 과거의 상처를 건드리려 하느냐고 냉랭하게 거부 반응을 보였다. 어느 할머니는 나를 보고 4·3때 죽은 큰아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며 내 손목을 붙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가슴 속에 응어리로 맺힌 쓰라린 사연을 끝내 털어놓지 않아서 나 역시 덩달아 울기만 하고 발걸음을 돌린 적도 있었다. 취재 내용을 토대로 작품을 만들 때 나는 눈물 젖은 목소리로 말하던 증언자들의 달랠 길 없는 한과 분노가 고스란히 내 작품에 반영되기를 원했다. 작품 형상화의 과정에서 나는 소설의 주인공들이 겪는 고난을 마치 내 자신이 겪은 듯한 뜨거운 일체감을 느꼈다. 글을 쓰다가 눈물을 흘린 적이 여러 번이었다.
1978년 여름, 4·3을 다룬 나의 첫 소설 ‘순이 삼촌’이 계간지 ‘창작과비평’을 통해 세상에 나타났는데, 뜻밖에도 독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순이 삼촌’에 이어 4·3을 소재로 ‘도령마루의 까마귀’, ‘해룡 이야기’를 잇따라 써냈고, 이듬해에 이 세 작품이 포함된 작품집을 ‘순이 삼촌’이란 이름으로 출간하게 되었다. 그렇게 도전적인 글을 썼는데, 정부가 그냥 무사히 넘어갈 리가 만무했다. 결국 유신정권이 내 도전에 응답해왔다. 군 정보기관인 보안사의 지하실에 끌려가 3일간 고문을 당하고 한 달간 수형 생활을 해야 했다. 온몸을 잉크 빛으로 검푸르게 멍들게 한 그 가혹한 매질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놀란 새처럼 가슴이 조마조마해진다.
그 직후 불온 도서로 낙인찍힌 이 책은 판금 14년을 겪고 나서 민주화와 더불어 해금되었다. 이 책이 처음 발간된 지 어느덧 44년 세월이 흘렀는데 그동안 그리 많지는 않지만 꾸준히 팔리고 있으니 그 생명력이 꽤나 질기다고 하겠다.
소설가
■그리고 다음 책들
변방에 우짖는 새
구한말에 제주도 전 도민이 봉기한 최대 민란이었던 방성칠란과 이재수란의 과정을 그려낸 역사소설. 특히 이재수란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거납운동에서 시작된 그 민란이 어째서 민중에 의한 천주교인 박해로 이어지게 되었는가 그 연유를 탐구하여 민란의 역사적 성격을 구명하려고 했다. 민란의 역동적인 꿈틀거림을 실감 있게 묘사하려고 노력한 이 소설에는 그 민란을 있게 한 당시의 정치·경제·사회적 병리 현상이 잘 드러나 있다.
창비(1983)
지상에 숟가락 하나
일곱 살 때 4·3을 목도한 작가의 자전적 성장소설. 온갖 역경 속에서도 찌들지 않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또래의 동무들과 함께 성장해가는 한 아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4·3의 아이들은 그 참사의 슬픔에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슬픔은 성장에 해로운 것이므로 천진난만함으로 이겨냈다. 4·3의 폐허, 그 검은 재와 숯더미 속에서 어린 초목들이 솟아올라 들판을 푸르게 덮듯이, 제주의 아이들은 죽음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라났다.
실천문학사(1999·절판, 이후 창비 개정판)
누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던 1980년대에 청춘을 보낸 386세대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물신주의와 소비향락주의에 지배당하게 된 오늘의 세태를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한때 민주화운동의 중심이었다가 이제는 새로움을 잃고 기성세대가 된 386세대와, 민주화 이후에 성장기를 보낸 무비판적인 오늘날의 젊은이들. 이 두 세대를 함께 견주어보면서, 시대가 변해도 지켜야 할 가치와 청춘의 열정이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질문하고 탐색해 본다.
창비(2009)
제주도우다 1·2·3
4·3의 비극으로부터 살아남은 자 안창세의 목소리로 젊은 세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일제강점기부터 4·3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현대사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총체적으로 다룬 대하소설. 새 나라 건설의 꿈에 벅찼던 해방공간의 열망과 좌절을 그려내면서 국가의 폭력에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을 진혼한다. 인간의 본질을 되묻게 하는 가공할 폭력을 고발하는 한편 화산섬 제주의 땅과 바다, 그 산천을 닮은 인간들의 아름다움을 그려내려고 했다.
창비(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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