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그 울분을 품고도 아직도 ‘약한 남성’ 되기가 두려운가

최원형 2023. 12. 22.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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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남성성은 여성·장애인 등 소수자를 '적'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내면에 쌓인 울분을 그들에 대한 폭력으로 폭발시키는, '위험하고 비뚤어진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곤 한다.

과거처럼 권위를 휘두르는 가부장이 될 수도, 그렇다고 능력주의 사다리의 상층에 올라앉은 한 줌의 자유주의적 남성이 될 수도 없는 이 시대 남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과연 이것밖에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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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비평가가 분석한 남성성
소수자도 다수자도 못되는 ‘잔여’

가짜 ‘적’에 증오·폭력 향하지 말고
약함 직시하고 제대로 상처받아라
일본의 사회비평가 스기타 슌스케는 ‘약자 남성’을 열쇠 말 삼아 일본 사회의 남성성을 파헤치는 책들을 써왔다. 게티이미지뱅크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

승자도 패자도 아닌 존엄한 인간으로 사는 21세기 남성학

스기타 슌스케 지음, 명다인 옮김 l 또다른우주 l 1만6800원

오늘날 남성성은 여성·장애인 등 소수자를 ‘적’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내면에 쌓인 울분을 그들에 대한 폭력으로 폭발시키는, ‘위험하고 비뚤어진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곤 한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인셀’(비자발적 독신 남성)의 혐오와 테러, 안티 페미니스트들의 끈질긴 ‘페미 몰이’ 등이 이를 확인해준다. 과거처럼 권위를 휘두르는 가부장이 될 수도, 그렇다고 능력주의 사다리의 상층에 올라앉은 한 줌의 자유주의적 남성이 될 수도 없는 이 시대 남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과연 이것밖에 없는 것인가.

일본 사회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남성성을 분석해온 사회비평가 스기타 슌스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에서 ‘약자 남성’으로서 살아간다는 길을 제시한다. 기본적으로 그가 포착하고 있는 남성이란 “소수자도 아니고 다수자에 속하지도 못하며 1퍼센트도 99퍼센트도 아닌 존재”,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와 조르주 아감벤에 따르면 ‘잔여’, ‘잔여물’에 해당한다. ‘국민·시민(다수자) 대 차별받는 자·배제당하는 자(소수자)’라는 대립구도의 사각에 놓인, 그 어디에도 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배경에는 정규직 고용과 표준적인 가족상이 무너져내리고 있는 가운데 남성과 여성·성소수자를 서로 다른 형태로 억압하고 ‘분할 통치’하는 자본주의 사회구조가 있다. 지은이는 여러 실증적인 근거들을 들어, 일본 사회에서 여전히 남성이 여성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음을 지적한다. 여성 비정규직 비율은 남성의 두 배, 남성의 평균 임금은 여성의 1.5배, 관리직의 90퍼센트가 남성, 국회의원 90퍼센트가 남성이다. 그러나 이런 ‘남성 특권’이 있는데도 남성의 행복도는 전반적으로 여성에 미치지 못한다. 정규직 고용자에 한해서만 여성보다 남성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비율이 높을 뿐이다. 문제는 다수자 남성들 사이에도 여러 층이 있고, 그중 비정규화, 주변화된 ‘약자’ 남성은 경쟁·인정·생산성·능력주의 규범에서 버려졌는데도 그 규범에 짓눌려 내면의 괴로움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기타 슌스케는 소수자도 다수자도 아닌 남성이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출발점이라 말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인정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피해자 의식과 공격성이 생긴다.” 그동안 약자로서 남성의 자의식은 안티 페미니즘과 안티 자유주의 흐름과 깊이 결합하곤 했다. 지은이는 “소수자는 차별당하는 속성을 무기로 내세워 정체성 정치로 전환할 수도 있”지만(물론 그들의 처지가 더 낫다는 의미는 아니다), 소수자 속성이 없는 남성들은 그렇지 못한 현실을 지적한다. 소수자를 ‘적’으로 오인해 그들과 ‘약자 경쟁’을 벌이고, 나아가 폭력까지 가하는 ‘안티’나 ‘인셀’의 수렁에 빠졌다는 것이다.

영화 ‘조커’와 ‘다크나이트 라이즈’, 무라카미 하루키와 안톤 체호프의 작품 등을 경유하며 지은이가 제시하는 것은 자신의 상처, 고뇌, 절망, 굴욕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길, 곧 약함을 인정하고 타인과 공유하는 길이다. 자신의 약함을 직시하고 ‘제대로 상처받는 것’이 먼저다. 그 뒤엔 두 가지 길이 열릴 것이라 한다. 오인된 가짜 ‘적’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쓸모 없으면 버리는 이 사회를 향한 분노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는 ‘인셀 좌파’가 될 수 있다. 그럴 수 없다면? “생활을 버티고, 그 누구도 죽이지도 증오하지도 않고, 자신을 죽이지도 않고, 평화롭게 조용하게 멸망하는 것. 허무한 인생을 완주하는 것. 남아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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