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핫플] 폐건물에서 피어난 문화...일상속에서 누리는 예술
쇠락의 길 걷다 폐업한 해동주조장
2019년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
누구나 전시관·체험실 등 이용 가능
기획전도 열려…연간 15만명 방문
1966년 전남 담양 중심가에 양조장이 들어섰다. 이름하여 해동주조장. 물 좋고 땅이 기름져 쌀맛도 좋은 고장이었으니, 해동주조장에서 나온 술은 점점 인기를 끌었다. 지역민의 자부심이 되기도 했다. 주인장 일가가 지역에서 제일가는 부호로 손꼽힐 만큼 주조장이 성했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주로 소비하는 주종이 맥주·소주로 바뀌었고, 전세계에서 갖가지 술이 들어오며 막걸리 양조장은 쇠락의 길을 걷다 마침내 2010년 폐업을 맞았다. 한때 위용을 자랑했던 건물들은 빈 채로 방치돼 흉물이 됐다. 그러다 2019년 폐건물에 새로운 문화가 꽃피었다.
◆오래된 것이 아름답다=예스러운 담장 너머로 박공 지붕 모양의 시멘트 건물이 서 있다. 오래된 듯 허름한 외관에는 세련된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 옆으로 징크 지붕을 얹은 건물이, 다른 편에는 한옥이 자리 잡았다. 고색창연함과 현대미가 어우러진 이곳은 해동문화예술촌이다.
해동주조장이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건 2019년 6월이다. 담양군이 원도심을 되살리고자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한 ‘산업단지·폐산업시설 문화재생사업’에 공모하면서 리모델링이 시작됐다. 약 7440㎡(2250평) 면적에 지은 양조실, 누룩 제조실, 안채, 창고, 축사 등 10동은 누구나 예술적 영감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다시 태어났다.
중심 공간은 전시관이다. 벽체 일부가 시원스레 트여 있어 개방감을 주지만, 본래는 함석으로 친 벽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누룩 제조실이었다. 답답하고 폐쇄적인 공간이 180도로 변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예술 공간’이라는 정체성이 한눈에 보이는 건물이다. 다양한 주제의 회화·조각·설치미술 전시가 이뤄진다. 전시는 두달에 한번씩 바뀌는데, 고품격의 기획전이 1년에 6회나 진행되는 건 대도시에서도 흔치 않다.
전시관 옆에는 옛 해동주조장 주인장 일가의 안채가 있다. 안온한 한옥의 멋스러움이 그대로 남은 곳은 현재 관람객 쉼터로 쓰인다. 그곳에서 바깥을 내다보면 소담한 정원이 눈에 담긴다. 크진 않지만 화초와 나무가 잘 가꿔져 있어 보는 맛이 있다.
술맛이 좋아지려면 물맛이 좋아야 한다고 했다. 해동주조장이 잘나갔던 이유는 물맛이라는데, 그 비밀은 안채 마당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바로 깊이 22m의 우물이다. 펌프에 마중물을 넣고 여러번 펌프질을 한다. ‘끼익끼익’ 마른 소리가 이내 ‘찰박찰박’ 물소리로 바뀐다. 수도로 물이 쏟아진다. 펌프에서 나온 물은 정원 연못으로 흐른다. 우물 펌프질은 해동문화예술촌에 놀러 오는 아이들이라면 빼놓지 않고 하는 놀이란다. 안내를 맡은 김옥향 담양군문화재단 학예연구사는 “아이들에게는 옛것을 체험하는 것 자체가 최고의 놀이이자 영감을 얻는 경험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쪽 깊숙이 자리한 ㄱ자 건물은 해동주조장의 역사를 기록한 아카이브 전시관이다. 사진·책자부터 술병까지 당시 사용한 물건이 보존돼 있다. 막걸리를 나르던 짐 자전거는 지금이라도 달릴 듯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다음엔 막걸리 양조 과정을 눈으로 배워보는 순서다. 나이 든 담양 사람에겐 잘나가던 왕년의 추억을, 어린 관람객에게는 낯설지만 흥미로운 복고 감성을 전한다.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딩동댕동’. 오후 4시쯤 근처 학교에서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해동문화예술촌 마당으로 하나둘 아이들이 들어온다.
지방에 살면 아쉬운 점이 한두가지겠냐마는, 그중 하나가 문화공간 부족이다. 상설 전시도 흔치 않고 음악·연극 공연은 더 귀하다. 담양 역시 얼마 전까지 그랬다. 해동문화예술촌이 문을 연 이후론 누구나 일상에서 자연스레 예술을 누린다.
해동문화예술촌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다. 어른 허리춤까지 오는 대문은 휴관일인 월요일은 제외하고 늘 활짝 열려 있다. 자유롭게 전시관·체험실·공연장을 이용할 수 있다. 그뿐일까. 공연장과 세미나실도 사전에 예약하면 무료로 대관할 수 있다. 요즘은 학교 축제를 앞두고 춤연습에 한창인 여고생들이 자주 공연 연습실을 빌려 쓴다. 어린이미술전시관에선 미술 체험이 정기적으로 열린다. 이 역시 무료다. 올해 미술 체험을 한 학생만 200명을 넘는다. 연간 방문객은 15만명에 이른다.
“안내하다 보면 담양 사람들에게 ‘오색동’이 가장 인기가 많은 것 같아요. 설명을 듣고 나면 다들 얼굴에 뿌듯함이 가득합니다.”
김 학예연구사는 붉은 벽돌로 단장한 오색동으로 발을 옮기며 말했다. 오색동의 전신은 1981년 지어진 ‘담양읍교회’다. 건물 역사는 그리 길지 않지만, 교회는 100여년간 담양의 공동체가 모인 공간이었다. 그냥 헐어버리기엔 의미가 깊어, 군이 매입해 재생했다.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다목적 아레나로 쓴다. 오색동은 외벽에 달린 12개 창문 때문에 특별하다. 군내 12개 읍면의 특징을 스테인드글라스로 표현했다. 예컨대 담양읍은 메타세쿼이아와 죽녹원의 대나무를 스테인드글라스로 표현했다. 다른 읍도 특산물이나 명소를 그려 나타냈다. 둘러만 보아도 군 구석구석을 알게 된다. 김 학예연구사는 “고향을 이토록 멋있게 설명해줘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고 전했다.
담양엔 볼거리가 많다. 죽녹원이나 소쇄원, 메타세쿼이아 길은 여행 철이 되면 인산인해를 이룬다. 한번쯤 들러봄 직한 명소도 좋지만, 언제든 ‘슬리퍼를 신고 들를 수 있는’ 곳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해동문화예술촌은 지역민의 일상을 다채롭게 만드는 그런 문화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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