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 없다"는 SF 스타작가 김초엽 "나는 노력형 인간"
존재의 경계 무너뜨리는 SF 작가로
독서 통한 재료로 소설 속 세계 구축
샘솟는 영감은 없어... 지독한 노력형
편집자주
로마시대 철학자 키케로는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책이 뭐길래, 어떤 사람들은 집의 방 한 칸을 통째로 책에 내어주는 걸까요. 서재가 품은 한 사람의 우주에 빠져 들어가 봅니다.
코로나19와 기후위기는 인간이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을 성찰하는 계기가 됐다. 인간 중심적 사고를 탈피하는 포스트휴머니즘이 힘을 얻게 된 이유다. 그러나 인간인 우리는 곰팡이와 버섯과 덩굴식물과 원석의 삶을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 칭송하는 문명에 젖어 다른 존재에 공감하는 방법을 잊은 건 아닐까.
과학적 상상력을 총동원해 존재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SF작가 김초엽(30)의 세계는 그래서 가치 있다. 작품 자체로 인간이 아닌 존재로서 세상을 감각하는 경험을 대리한다. 첫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에서 인간을 멸종 위기까지 몰아간 건 다름 아닌 덩굴식물이다. 신간 '파견자들'에서는 곰팡이를 모티프로 한 괴생명체 '범람체'가 지배한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종국에는 인간 중심적 사고를 내려놓고 겸허하게 다른 존재를 바라보게 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파견자들'을 읽고 "탄탄한 과학적 토대, 흥미진진한 스토리 전개, 윤슬처럼 반짝이는 문체,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들 간의 공존과 공생이란 강렬한 주제의식"이라며 극찬했다. 동시대를 사로잡은 무한한 상상력과 흡인력 넘치는 이야기의 근원은 무엇일까. 지난달 30일 경기 고양시의 김 작가 집 서재에서 그 단서를 찾아보았다.
평범한 과학자 되고 싶지 않아 SF작가가 된 과학도
하얀 벽지, 하얀 책상, 하얀 의자, 하얀 블라인드... 온통 하얀 김 작가의 작업실은 무균 상태의 실험실을 연상케 한다. 책꽂이에 빽빽하게 꽂힌 책의 책등과 서재의 주인이 취향껏 진열한 아기자기한 소품의 색감이 이채롭게 다가올 정도다.
어림잡아 700권인 김 작가 서재의 책은 세 갈래로 분류할 수 있다. 과학, 소설, 그리고 SF.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벽을 따라 세로 6칸 가로 5칸의 책장이 열을 지어 있다. 가장 위 칸에는 '코스모스'와 '창백한 푸른 점' '무지개를 풀며' '눈먼 시계공' 등 칼 세이건, 리처드 도킨스 같은 유명 과학저술가들의 책이 빼곡하다. 비이성적 사고를 비판하고 과학의 경이로움을 예찬하는 책들이다.
포항공대에서 화학을 공부하고 생화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김 작가는 졸업 직전까지는 전업 작가의 길을 진지하게 그린 적이 없다. 고등학생 때 배명훈 작가의 연작소설집 '타워'를 읽고 처음 SF에 흥미를 가졌지만 독자 수준의 관심이었다. 대학에서 공부와 연구를 거듭하면서 조금씩 습작을 했고, 2017년 교내 공모전에 응모하면서 SF를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책상과 바로 마주 보는 방향의 책장에 꽂힌 책은 대부분이 국내외 SF소설이다.
"화학 전공이다 보니 실험 수업 비중이 높았는데, 손으로 하는 연구 과정이 그리 즐겁지 않았어요. 과학자가 된다면 탁월한 과학자가 되지 못할 것 같았죠. 평범하게 살고 싶진 않은데, 100%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게 뭐 있을까 고민하다 딱 1년만 소설을 써보자고 했던 것이 지금에 이르렀어요."
"샘솟는 영감 같은 건 없어... 상상력 오해 깨야"
상상력은 모든 작가의 원천이다. 하물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세상을 오로지 두뇌활동으로 구축하여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해내는 SF작가는 그 능력을 어떻게 계발할까.
"영업 비밀인데... 저는 스스로 한 번도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틀에 갇힌 생각만 하는 것 아닌지 고민하며 성장했죠. 상상력에 대한 오해를 깨는 게 중요해요. 우리는 상상력을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재료를 많이 모으고 수집해 적당한 압력을 넣어 생기는 화학반응을 이용해 소재를 만들어내요. 저에겐 처음부터 소재가 없었던지라 '소재 고갈'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SF소설의 바탕이 되는 세계를 구축해야 할 때면 김 작가는 연금술사가 된다. 어떤 재료가 어떤 원천이 될지 모르기에 평소에 소설보다는 과학, 인문사회, 디자인, 예술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논픽션을 읽으며 낯선 개념을 메모해 둔다. 작가가 되기 전에는 취향이 확고한 독자였지만, 좋아하는 것만 편식했다가는 쓸 수 있는 게 없을 거라는 깨달음에 관심사를 넓히는 데 주력한다.
'파견자들'은 생물학자 멀린 셸드레이크가 쓴 과학에세이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에서 영향을 받았다. 지구상 모든 생명의 근원에 곰팡이가 있으며, 그 곰팡이의 능력과 잠재력이 상상초월의 수준임을 일러주는 책이다. 곰팡이를 모티프로 한 '범람체'라는 존재를 상상해낸 김 작가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세상을 감각하는 방법을 묘사하기 위해 온갖 생물이 세상을 감각하는 방식을 다룬 책 '이토록 굉장한 세계'를 뒤졌다. "이런 재료들을 두 개, 세 개, 네 개 섞다 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돼요."
일본에 역대 최고 금액 선인세를 받으며 판권 계약을 한 것을 비롯해 동아시아 전역에서 사랑받고 주목받는 작가 김초엽은 지독한 '노력형 작가'다. 책장의 아래로 내려갈수록 즐비한 작법서와 소재 발굴을 위해 참고하는 다양한 논픽션이 그가 직조해내는 세계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소설쓰기의 모든 것' '트라우마 사전' '작가를 위한 세계관 구축법' 등 다양한 작법서가 한가운데를 단단하게 지키고 있는데, 특히 '파견자들'을 쓸 때 작법서를 탐독하며 인물을 세밀하게 설정하는 데 공을 들였다.
"샘솟는 영감 같은 건 없어요. 그저 당면한 일이 있을 때 급하게 쥐어짜고 섞는 게 제 스타일이에요. 소설을 쓰면서 이런 방식을 받아들이니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책은 능동적 생각을 '강요'하는 매체"
올해의 가장 첫날부터 그는 '파견자들'을 쓰기 시작했다. 5월 말에 초고를 끝냈고 수정을 거듭하다 9월에 최종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다. 10월 중순에 출간된 책은 4만 부가 팔리며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서재에 놓인 탁상달력에 표시되어 있는 11월 북토크와 인터뷰만도 17회에 달했다.
숨 가쁜 한 해를 보낸 김 작가는 이달 말 태국 치앙마이로 가서 휴식을 취하고 필요한 글을 쓰면서 다음 작품을 구상할 계획이다. 모처럼의 쉼을 위한 시간을 채우는 방법 역시 독서다. 물리적인 한계로 종이책을 모두 들고 가지 못하기에 낯선 곳에 체류하며 글을 쓸 때는 전자책을 요긴하게 사용한다.
"많은 분들이 책을 읽지 않는 이유도 이해가 가요. 스마트폰을 쓰고 있으면 책을 읽으려는 마음을 갖기 힘들잖아요. 즉각적으로 피드백이 오고 원하는 걸 바로 찾을 수도 있으니 책이 후순위로 밀리는 게 어쩌면 당연할지도요."
김 작가는 책이 '생각을 강요하는 매체'라서 좋아한다. 유튜브나 넷플릭스 같은 매체들은 '생각하지 않고' 빠져들기를 요구한다. 책은 아무리 재밌다고 해도 중간중간 생각하기 위해 쉬어야 하는 '휴지기'가 꼭 존재한다. 그 불편한 순간이 능동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고, 궁극적으로 삶의 중심을 스스로 잡게 하는 힘이 되어준다는 게 그의 독서지론이다.
아직은 낯설어하는 이가 많은 SF장르 '영업'을 해달라고 김 작가에게 부탁했다. "SF는 머리를 아프게 하고 실험적인 이야기라는 매력이 있어요. 어떤 작품은 현실과 아무 상관 없는 퍼즐 푸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어떤 작품은 소설이 아닌 보고서를 읽는 듯한 감상이 들게 하죠. SF가 낯설다면 입문용으로 알려진 작품을 몇 권 읽어보세요. 그래도 취향이 아니다 싶으면... 어쩔 수 없죠, 뭐!"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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