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79> 징비록-서애 류성룡(1542~1607)
- 서애가 집필 ‘임진왜란 전란사’
- 조·일·명 국제전으로 분석 탁월
- 아픔 반복되지 않게 성찰 강조
- 1591년 日통신사 엇갈린 보고
- 조선은 뒤늦게 왜국 침입 대비
- 방심·자만이 참혹한 참상 야기
- 최고의 영웅으로 이순신 거론
- 軍 - 의병 대립 사건 등도 다뤄
“임진왜란 초기, 조선이 왜국에 속절없이 무너진 이유는 무엇인가. 왜국은 전국시대를 겪으며 싸움에 익숙했고 20만 대군을 파병할 정도로 강성해진 그쪽 정세를 우리가 못 읽어서였다. 조선인은 100여 년 큰 외침 없이 살아 전쟁을 잊었다. 해안을 노략질하던 왜구 떼를 막는 남방 방어책에 머물렀다. 거기에 북쪽 여진을 나름대로 제압하면서 국토 수호에 자신감을 가진 게 방심을 불렀다.”
▮왜군을 몰아낸 역사 담긴 징비록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은 자신이 지은 현존 초본 징비록(懲毖錄, 국보 132호)에서 임진왜란(1592~1598년)을 조·일·명 국제전으로 봤다. 발발한 까닭을 내놓았다. 그 내용을 현대 어법에 실으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국제 정세를 못 읽으면 나라가 어지럽다는 교훈을 준다.
징비(懲毖).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인 시경(소비편)에서 따왔다. ‘모기징(矛其懲), 이비후환(而毖後患)’이란 구절에서다. ‘나는 지난날을 징계하여 후환을 조심한다’는 뜻. 국토뿐만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데 도움 주는 명언이다.
징비록은 한반도가 한 몸이었던 16세기 말, 부산에서 평양까지 민관이 한마음이 돼 이 땅에서 왜군을 몰아내려 힘겹게 싸웠던 역사를 펼쳐 놓는다.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가 임진왜란이란 문에 달린 자물통이라면, 징비록은 그 자물통을 따고 임란 속으로 들여보내는 열쇠.
먼저, 이 고전을 훌쩍 넘겨 임란 마지막 해인 1598년으로 가 본다. 조·일·명 정세가 요동친다. 왜군은 전해에 다시 정유재란을 일으켜 침범하지만, 이순신 수군이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둬 그들을 막는다. 이제 임란은 실패한 전쟁. 전쟁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는 충격받았는지 중병을 앓다 죽고, 정권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쥔다. “명나라를 응징하려니 조선은 길을 비켜야 한다(假道入明·가도입명)”며 명분 없이 조선을 침략한 히데요시와 그 아들은 민심을 잃고 2대 만에 사라졌다.
조선도 급박하다. 11월 18일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적탄을 맞고 최후를 맞는다. 같은 날 임란을 지휘해 온 영의정 서애는 파직당했다. 이이첨을 포함한 정적 북인이 탄핵한 결과. 그해 명나라 병부 주사 정응태가 ‘조선이 왜국과 내통한다’고 내뱉었다. 이 무고에 조정은 서애와 이항복에게 명에 가서 해명하라고 명했으나 서애는 가지 않았으니, 정적이 그 호기를 놓칠 리 없었다. 서애는 12월에 삭탈관직당하고 이듬해 안동 하회마을로 낙향한다.
명나라는 임란 발발에 원인을 제공한 나라치곤 시큰둥한 자세였다. 명 신종은 조선에 베푼다는 식으로 조승훈 심유경 이여송 양원 마귀 같은 육·해군 장군을 보냈다. 그들은 원정 비용을 줄이려 했기에 일본과 강화에 무게를 뒀다. 조선군에 왜병을 죽이지 말라고 강요한 장군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원군 파병을 역설했던 명 병부상서 석성이 화를 입었다. 대일 강화 협상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벼슬을 잃고 옥에 갇혔다. 공로 다툼하던 양원은 조선에서 심유경을 체포하면서 이 같은 명군 내부 분란이 밖으로 드러났다. 이즈음 후금 누르하치 세력은 힘을 키우면서 청을 건국하는 쪽으로 내달았다.
낙향한 서애로 돌아가 보자. 1604년께 현존 초본 징비록을 냈다. 여기서 내용이 일부 수정된 두 번째 초본이 나왔으나 전하진 않는다. 서애가 1607년 죽기 이전에 썼다고 추측되는 이 증보 초본을 바탕으로 1647년께 16권본이 발간됐다. 징비록(1·2권), 근폭집(3~5권), 진사록(6~14권), 군문등록(15권), 녹후잡기(16권)로 짜였다. 후대엔 징비록(1·2권)과 부록으로 녹후잡기(錄後雜記)를 묶은 판본이 잘 알려졌다. 녹후잡기엔 ‘조짐’ ‘군사훈련’ ‘심유경의 변설’을 포함해 11꼭지가 실렸다.
징비록엔 임란 참상이 흘린 피가 흥건하다. 왜병은 조선인 코를 베어 전과로 삼는다. 한양에선 유서 깊은 건물과 고서를 불태우고 양민을 마구 죽였다. 식량을 못 가져가면 불 지르고, 전국을 쑥대밭으로 만드니 기근이 들었다. 길에서 젖먹이가 죽은 어미에게 기어가 젖 빠는 광경을 본 서애가 눈물짓는 장면이 나온다.
▮조선군 내부 분란도 다룬 징비록
조선군 내부 분란도 다뤘다. 왜병과 싸워야 할 용궁 현감 우복룡은 아군(방어사 소속 하양 군사) 수백 명을 반란군으로 몰아 떼로 죽였다. 바다에선 이순신과 원균, 통신사로 돌아온 김성일과 황윤길, 조선군과 의병 간 대립인 의병장 정문부와 순찰사 윤탁연이 또 다른 대립 쌍.
서애는 현실론자였다. 강화가 필요하지만 ‘강자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받으면 나중에 발목을 잡힌다’는 약육강식 철칙을 우려한 우국지사. 그는 임란 초기부터 명군 파병 업무를 맡은 터라 나라 안팎에서 주화파라며 공격받았다. 왜국을 끝까지 응징해야 한다는 주전파에 비해 입지가 좁았다. 당시 조선 국력으로선 왜국과 전쟁을 이어가는 건 무리라는 게 서애 판단. 명에선 ‘간신’이라는 욕까지 들었던 서애는 세상에 해명할 통로를 찾아냈다. 바로 징비록 저술이었다.
징비록 2권 마지막인 69화가 그런 복심을 보여준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전장에서 밤낮을 경계해 갑주를 푼 적이 없다는 내용. 이 고전 후반부는 사실상 징비록 속 난중일기다. 서애는 이순신 활약이 임란을 끝내게 한 가장 큰 요인이라며 강조한다. ‘…여러 장수는 이순신을 신으로 여겼다’. 징비록 마지막 문장이다. 이순신에 대한 서애 평가가 이 한 문장에 들었다. 저자는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런 이순신을 제가 천거했답니다.’
1권 초반에 드러난 조일 정세는 임란이 터지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필수. 1587년 6월 히데요시는 쓰시마 태수인 소 요시토시와 그의 아들에게 “조선 국왕이 나를 알현케 하라”는 임무를 준다. 9월에 일본 사신(다치바나 야스히로)이 오고, 선조는 일본 가는 물길에 어둡다며 조선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신숙주가 성종에게 일본과 화의하란 유언을 남겼지만 말이다.
다시 온 왜국 사신(소 요시토시)을 따라 황윤길과 김성일(상사) 허성(서장관)이 통신사로 왜국에 간다. 왜병 노략질을 도운 후 일에 투항한 조선인들을 넘겨받아 벤 뒤였다. 요시토시는 이때 처음으로 조총을 가져와 선조에게 바쳤다. 선물을 빙자한 은근한 자국 과시였다.
1591년 1월 통신사는 귀국했는데 보고가 엇갈렸다. 황윤길은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 김성일은 ‘그런 정황을 보지 못했다’였다. 히데요시는 4월 들어 명을 치기 위해 조선으로 건너갈 전함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소식이 명나라에도 건너갔다. 조선도 서애 주장에 따라 명에 알렸다. 조선도 뒤늦게나마 왜국 침입에 대비한다. 하지만 오랜 평화를 누려온 민심은 노역에 원성이 높았다. 이때 서애는 빛 보지 못한 정읍 현감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파격 발탁한다. 9화부터 임란 발발(1592년 4월 13일)을 다뤘다. 이일과 신립이 상주와 충주에서 패한 후 속속 조선군은 밀려 선조는 한양을 떠나 평양 영변 정주 의주로 피란 간다. 그는 이항복과 명나라 망명을 논의한다. 용인에선 왜병이 자른 조선군 목 1000두가 나무에 걸린다.
징비록 속 임란을 복기하면 한국민은 주먹이 쥐어진다. 힘들게 되찾은 이 땅에서 우리가 받아 든 성적표는 시원찮다. 2030세계박람회(엑스포) 부산 유치라는 국제전만 해도 그렇다. 한국이 얻는 ‘29점’과 사우디가 딴 ‘119점’. 수치로 비교되니 할 말이 없다. 이번 엑스포라는 국제전에선 이순신 같은 명장은 없었다. 한국이 ‘21세기 징비록’을 써야 할 이유다. 임진왜란은 결코 끝난 게 아니라는, 다시 징비하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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