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위해 사는 게 ‘행복’ 그 마음으로 70년간 사제의 길 걸어왔다
‘범사(凡事)에 감사’하는 삶이란 이런 것일까.
성탄절(25일)을 앞두고 지난주 경북 의성 봉양면 문화마을에서 만난 두봉(94) 주교는 보행 보조기를 밀면서 나타났다. 사제 모임 참석차 11월 대만을 방문했다가 계단을 헛디뎌 대퇴부 골절상을 입어 수술받고 귀국했다고 했다. “큰일 날 뻔하셨다”고 하자 두봉 주교는 “감사한 일”이라 했다. “더 크게 안 다친 게 다행이고요. 제가 당뇨, 고혈압 같은 병도 없고, (체중이) 가벼워서 잘 나을 거라고 의사가 말했어요. 다 하느님이 베풀어 주시는데요. 웃으면서 감사하면서 수술실에 들어갔어요. 하하하.”
두봉 주교는 올해로 사제 서품 70년을 맞았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953년 사제가 돼 이듬해 한국에 왔다. 대전교구에서 사목하다가 1969년 대구대교구에서 분리된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을 맡아 농민, 서민들과 어울리며 ‘기쁘고 떳떳하게’(안동교구 사명 선언문) 살았다. “한국인 사제가 교구장을 맡아야 한다”며 네 차례에 걸쳐 교황청에 사임 청원을 한 끝에 1990년 교구장에서 은퇴했다. 2019년에는 대한민국 국적을 ‘선물’받았다. 그는 최근 ‘유명 인사’가 됐다. 작년 초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제 이름은 산봉우리[峯]에서 노래하는 두견새[杜]라는 뜻”이라고 소개하며 아이처럼 맑고 유쾌한 모습을 보여준 이후 ‘모르는 사람’들까지 찾아와 사진도 찍고 차도 마신다고 한다. 고령에 손님맞이가 힘들 법도 하지만 그는 “이 또한 하느님이 베풀어준 기회”라며 또 “하하하” 웃었다. 기뻐서 웃고, 웃으니 기쁜 것 같았다.
두봉 주교는 “성직자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 힘을 주는 직업”이라 했다. 남에게 나누는 기쁨과 행복의 에너지는 그가 ‘주님의 시간’이라 이름 붙인 침묵 기도로 얻는 듯했다. 그는 매일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체조·목욕·미사·아침식사(빵)·성무일도(聖務日禱)를 마친 후 오전 8시부터 9시까지 “하느님 앞에서 침묵을 지킨다”고 했다. “하느님은 무슨 말씀을 드려도 다 알고 계시고, 무슨 부탁을 드려도 다 알고 계시고, 가장 필요한 것이 뭔지 알고 이끌어주시고 봐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말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게 더 좋아요. 아무런 생각 없이 빈손, 빈 마음으로. 하느님 내 안에 들어오시는 시간입니다.”
가난한 농부 집안 출신이다. 초등학교 이상 공부하기는 형제 중 그가 유일하다. 그렇지만 마을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달려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보며 자랐다. 어릴 적부터 꿈꾼 사제의 길을 최종 확신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종교철학 강의를 들으면서였다. 강의를 맡은 사제는 ‘사랑과 행복의 단계’를 설명했다. “사랑과 행복에는 단계가 있다고 했어요. ‘사랑이라 부르는 것엔 욕심도 있고, 남녀 간 사랑도 있다. 가장 높은 단계의 사랑은 자기를 버리고 남을 위해 제 목숨까지 내놓는 것이다. 행복에도 자기 만족 같은 것도 있지만 최고 행복은 남을 위해 사는 것이다. 최고의 사랑과 행복이 예수님의 사랑과 행복이다’라고 했지요. 복음서에 ‘행복하여라’ 하셨지요. 그렇게 사는 것이 사제의 삶이라 하셨고요. ‘이거 나에게 딱 맞는 거다’라고 생각했어요.”
그 생각으로 신학교에 입학해 사제가 됐고, 70년이 흘렀다. 그동안 한 번도 후회하거나 답답하거나 다른 생각이 든 적 없었다. “만족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기뻐요. 하하하.”
벽안의 스물다섯 청년 사제가 한국에 첫발을 디딘 때는 1954년 12월 19일. 성탄을 앞둔 딱 이맘때였다. 네 사람이 함께 와서 지금은 두봉 주교와 대전교구 백요한(95) 신부, 둘만 남았다. 12월 19일 무렵이면 함께 온 90대 중반의 노(老)사제들은 통화를 하면서 옛 이야기를 나눈다. 도착 당시 한국, 전쟁의 상흔(傷痕)은 여전했고 날씨는 매섭게 추웠다. 사람들은 따뜻했고 친절했다. 어려운 형편에도 서로 돕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어려운 처지를 원망하기 쉬운데, 정말 어려운 사람들은 오히려 원망하지 않아요. 가진 것으로 만족해요. 아주 참 묘해요.” 지금 한국은 확실히 선진국이 됐지만 인심이나 친절함은 예전만큼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려운 사람은 언제 어디에나 늘 있습니다”라고 했다.
살아오면서 100번 가까운 성탄을 맞았고 한국에서 맞는 성탄절만 70번째다. 그는 “신자 처지에서 볼 때 성탄은 참 고마운 일”이라고 했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아다니고 모시려고 하는데, 하느님이 우리를 쳐다봐 주시고 찾아오신 것이잖아요. 사람이 되셔서. 그래서 성탄은 신앙의 기쁨이고 고마움이에요.” 그는 그냥 기쁨에 머물지 말고 서로 도움 주고, 선물해야 한다고 했다.
성탄을 맞는 이들에게 ‘최고 행복을 누리는 비결’도 귀띔해줬다. “남들에게 행복을 주려고 하면 돼요.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하지요.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면, 남들에게 행복을 주면 자기가 행복을 누리게 돼요. 아주 묘한 그런 행복을 누리게 돼요. 내가 행복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안 하고 남들에게 도움을 주고, 남들에게 행복을 주면 반사적으로 내가 행복을 누리게 돼요. 최고의 행복을 누립니다. 이건 제 체험이기도 해요.”
그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이 다 베풀어주신다”고 했다. “그냥 웃으면서 하느님이 베풀어주시는 대로 마음 편안하게 웃으면서 감사하게 받으면 돼요. 그리고 남에게 행복을 주면 최고로 행복해집니다. 무슨 일을 하든 기쁘고 떳떳하면 힘이 나요. 하하하.” /의성=김한수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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