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훈의 유행민감] K컬처의 미국 정복? J컬처의 역습이 시작됐다

김도훈 문화칼럼니스트 2023. 12. 2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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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2023년은 한국 대중문화 미국 정복의 해였나? 빌보드만 보면 그렇다. 올해만 해도 방탄소년단 멤버 지민과 정국이 싱글 차트 1위에 올랐다. 아이돌 그룹 뉴진스, 투모로우바이투게더, 스트레이 키즈, 에이티즈는 앨범 차트 1위에 올랐다. 빌보드 차트 정복은 강력한 팬덤의 집중적 첫 주 앨범 구매로 쟁취한 성취라는 말도 많다. 강력한 팬덤이 죄는 아니다. 강력한 팬덤도 성취다. 물론 뉴진스의 성과는 강력한 팬덤이 만들어지기 전이므로 더 의미가 있다. 내가 뉴진스 팬이라서 하는 소리 맞는다. 한편 넷플릭스에서는 ‘더 글로리’ ‘피지컬: 100′ 등이 미국에서도 높은 시청 시간을 기록했다. 이 정도면 한국 대중문화가 미국에서 마침내 의미심장한 수금을 시작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승리?

안타깝지만 2023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딴소리 좀 해야겠다. 사실 2023년은 일본 대중문화 미국 정복의 해로 기록될 예정이다. 올 12월 미국 박스오피스는 일본이 정복했다. 도호가 제작한 ‘고지라 마이너스 원’이 12월 초 미국 박스오피스 2위에 올랐다. 미국이 도호로부터 판권을 사 제작한 할리우드판 고’질’라 영화가 아니다. 일본 관객을 위해 제작된 고’지’라 영화다. 흥행은 반짝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 지금까지 수익만 3500만달러(약 455억원)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 만들기의 정점”이라 칭찬할 정도로 반응도 좋다. 한국서도 개봉한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도 12월 둘째 주 미국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현재까지 수익만 2300만 달러(약 298억원)가 넘는다.

많은 한국 영화가 북미 시장을 넘봤지만 명확하게 성공을 거둔 건 한 편뿐이다. 오스카 작품상 수상작 ‘기생충’이다. 총수익은 5300만달러(약 685억원)다. ‘고지라 마이너스 원’과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금방 넘어설 수치다. 게다가 두 영화의 성공은 일본 대중문화의 독창적 장르인 괴수물과 애니메이션이며 일본 내수 시장용이라는 지점에서 흥미로운 데가 있다. ‘고지라 마이너스 원’은 패전 후 고통받던 일본인들이 괴수 침공을 이겨낸다는 아주 일본적인 이야기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역시 2차대전 중 일본을 무대로 한 하야오 감독의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를 담은 작품이다. 미국에 팔려고 만든 게 아니라는 소리다.

두 영화의 성공은 오로지 문화의 힘이다. 1954년 작 ‘고지라’로부터 출발한 괴수 영화 장르는 일본에서는 대중문화였지만 해외에서는 서브컬처(소집단이 즐기는 하위 문화) 중의 서브컬처였다. 서브컬처라는 게 그렇다. 소수 마니아들의 괴상한 취미로 출발하지만 마니아층이 세대와 세대를 이어서 지속되면 어느 순간 주류가 된다. 어린 시절 ‘고지라’ 시리즈를 힘들게 찾아보던 서구 마니아들은 커서 할리우드를 이끄는 인물들이 됐다. 스필버그가 바로 그런 양반이다. ‘쥬라기 공원 2′(1994) 후반에는 공룡으로부터 도망치며 “내가 이런 걸 피해서 일본을 떠났는데”라고 소리 지르는 일본인들이 등장한다. 이미 그 시점 미국 시장에서 고지라라는 존재는 서브컬처를 넘어섰다는 이야기다. 지금 ‘고지라 마이너스 원’의 미국 흥행은 일본이 오랫동안 창고에 쌓아온 문화 상품의 첫 본격적 미국 침공이라 일컬어도 좋을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도 마찬가지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미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예술가다. 그럼에도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점령할 정도까지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적은 없다. 예전 최고 흥행작은 2002년 북미 개봉해 1520만달러(약 200억원)를 벌어들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이전 작들의 패턴을 넘어섰다. 한정된 극장들을 시작으로 장기 상영으로 흥행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첫 주 2000여 개 극장에서 동시에 관객을 맞이하는 블록버스터 개봉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것 역시 ‘고지라 마이너스 원’과 마찬가지로 일본 서브컬처 역습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일본을 벗어나는 순간 대중문화라기보다는 마니아 문화였다. 다 큰 어른이 만화나 보고 앉았냐는 소리는 한국인만 듣는 게 아니다. 어디나 비슷하다. 이미 말했다시피 서브컬처는 오래 지속되면 주류가 된다. 제임스 캐머런 같은 감독이 1980년대부터 일본 애니메이션 영향을 듬뿍 받은 블록버스터를 만든 지 이미 반세기다. 넷플릭스가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들을 내놓기 시작한 것은 새로운 전기가 됐다. 한국이야 우리 성공 사례만 주목하지만 그간 일본 넷플릭스가 내놓은 애니메이션은 한국 드라마 못지않은 성공을 거두며 새로운 팬층을 넓혀왔다. 올해 넷플릭스가 실사로 제작한 ‘원피스’가 압도적인 성공을 거둔 것도 의미심장하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이제 미국서 그냥 개봉하더라도 예전과는 다른 대중적 지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중에서는 문화에 대결이 어디 있냐고 불평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한일 문화 상품의 미국 수익을 한화로 환원하기까지 하며 민족적, 경제적 가치에만 몰두하는 거 아니냐고 혀를 차는 분도 분명 계실 것이다. 어쩌겠는가. 원래 한국인이 그렇다. 라틴 음악이 K팝보다 더 미국 시장에서 강력하게 떠오른다는 이야기는 그냥 넘어가지만 일본 대중문화가 한국을 넘어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속 어딘가 숨어있던 희한한 애국심 같은 것이 괜히 막 빠져나와서 사람을 좀 못나게 만드는 데가 있다. 원래 국경을 바로 옆에 두고 있는 나라끼리는 다 그렇다. 영국과 프랑스, 그리스와 터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죽도록 서로를 견제하는 걸 한번 생각해 보시라. 그리고 문화가 뭐 그리 엄숙하고 대단한 것인가. 문화도 국경을 넘어서면 올림픽이 된다.

대중문화 세계 시장의 한일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각기 다른 장르를 무기로 삼고 있으니 안심이라고? 나의 2023년을 닫는 근심은 이것이다. 반세기에 걸쳐 이미 엄청난 팬을 거느린 다양한 IP(Intellectual Property·지식 재산)를 보유하고 있는 일본 대중문화 창고만큼 한국 창고가 넉넉한가? 혹시 전통적인 부잣집의 역습이 시작되고 있는 건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한 보다 정확한 답변은 2024년에 창작자들로부터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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