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을 쓴 검객? 외계 행성 핑계로 아시아 문화 뒤섞었네
우주를 지배하는 제국에 자원을 착취당하는 식민지 행성 ‘다구스’. 빌딩과 공장이 빼곡히 들어서 공기는 매캐하고 땅 위엔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홍콩 풍경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이 행성에선 일본 무사복을 닮은 의상을 입고 조선의 갓을 쓴 검객 네메시스(배두나)가 등장한다.
22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되는 영화 ‘레벨 문: 파트1 불의 아이’은 넷플릭스가 제작비 1억6600만달러(약 2164억원)를 투입해 만든 ‘성인판 스타워즈’로 기대를 모았다. 제국의 횡포에 시달리던 변방 행성의 전사들이 모여 반란을 꾀하는 이야기로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7인의 사무라이’를 우주 배경으로 옮겨놓은 듯하다. 잭 스나이더 감독 역시 “’스타워즈’ 시리즈와 ‘7인의 사무라이’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배두나가 맡은 역할인 검객 ‘네메시스’는 머리에 두른 면수건이나 검도복처럼 통이 넓은 바지, 쌍칼을 휘두르는 모습은 영락없는 사무라이인데 한국의 갓을 쓰고 등장한다. 스나이더 감독은 “갓의 시작은 ‘킹덤’이었다. 한국인으로서 배두나가 가진 뿌리를 표현할 수 있도록 존중하는 게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의상실장인 스테퍼니 포터도 “네메시스의 스타일은 배두나가 캐스팅되고 원래 콘셉트에서 가장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시작은 사무라이 콘셉트로 출발했으나, 한국 배우를 캐스팅하면서 한국적인 요소를 끼워넣은 모양새다.
K콘텐츠의 성공과 함께 한국 배우들의 할리우드 진출 소식이 자주 들려오지만, 극 중 역할엔 아쉬움이 남는다. 최근 개봉한 마블 영화 ‘더 마블스’에 출연한 배우 박서준은 춤과 노래로 소통하는 외계 행성의 ‘얀 왕자’ 역을 맡았다. 5분 남짓한 분량에 캡틴 마블과 춤을 추는 장면이 대부분이라 “발리우드 영화 주인공 같다”는 혹평을 받았다. 우주라는 배경을 핑계 삼아 아시아 국가의 문화를 한데 섞어놓고 특이한 외계 행성 중 하나로 묘사하는 꼴이다.
내년 디즈니+에서 공개 예정인 스타워즈의 새 시리즈 ‘애콜라이트’엔 배우 이정재가 마스터 제다이 역으로 출연한다. 제다이 역시 일본의 사무라이를 참고해 만든 캐릭터라 이정재가 어떤 모습으로 출연할지 관심이 쏠린다.
한국 배우의 연이은 할리우드 진출은 다양성을 고려한 캐스팅으로 아시아계 배우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 남가주대(USC)가 2007년부터 2022년까지 할리우드 흥행 영화 1600편의 캐릭터 6만9858명을 분석한 결과, 아시아계 캐릭터 비율은 3.4%에서 15.9%로 급증했다. 흑인 캐릭터는 13.0%에서 13.4%로, 라틴계 캐릭터는 3.3%에서 5.2%로 소폭 증가한 데 비하면 유의미한 성과다. 미국 내 아시아계 창작자들의 약진,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기생충’ 등 아시아 콘텐츠의 성공이 캐스팅 변화로 이어졌다.
양적 증가에도, 할리우드에서 아시아계 배우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은 여전히 한정적이란 비판이 제기된다. 배두나·박서준·이정재 모두 우주 배경 액션 영화에 출연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계 감독이 연출한 할리우드 로맨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에 출연한 배우 유태오는 최근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동아시아 배우로서 무협이나 코미디 장르에 기대지 않고, 로맨스 영화 남자 주인공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정말 특별한 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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