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난장] 위로와 고등어
상대 고려 않은 동정 대신 공감이 전제된 위로 필요
권명환 해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부장
올해만큼 다사다난한 적이 있을까. 연말의 진료실 분위기 또한 무겁다. 요즘 가장 많이 듣는 얘기가 경제적으로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말과 위로받고 싶다는 말. 퇴근길 버스, 옆 자리에 ‘비린내’가 앉는다. 고생한 손이 눈치 보며 대야를 숨긴다. 삐죽 튀어나온 고등어 한 마리, 핸드폰 너머로 나지막한 음성이 들린다. 가족이 돌아가셨나보다. 옆자리에서 흐느낀다. 대야의 고등어 눈이 슬프고 말갛다. 속상한 속을 갈라 소금을 뿌리면 마음이 상하지 않을까. 어떻게 주변에서 위로할 수 있을까.
위로는 따뜻한 말과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고 슬픔을 달래주는 것이다. 검색창에 ‘위로’라는 단어를 넣으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와 같은 긍정의 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힘들고 지칠 때 들을 노래나 책 추천해 주세요.”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적극적으로 찾아다니고 사회는 위로를 판매한다. 심리상담 사이트에서는 사진을 보고 위로받고 싶은 사람을 직접 선택할 수 있다. 패키지 상품에 할인까지 해준다. 하지만 나와 얘기를 나눈 사람들은 그런 방법이나 책, 노래가 잠시 위안은 되지만 깊은 위로가 되진 않는다고 말한다. 위안은 기분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유지가 어렵다. 듣고 싶은 말은 이미 수백 번 들어서 위로의 포인트를 곧잘 비껴간다. 위로가 넘치는데 정작 위로는 드물다.
진짜 위로가 필요한 순간은 애도다. 이별의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을 애도라고 부른다. 상실한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회복하는 정신의 과정인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무척 고통스럽다. 애도가 어려운 본질적인 이유는 상대가 아니라 나를 포기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왜 떠나보내지 못할까. 몹시 그리워서라 생각하겠지만 정신분석이 가르쳐주는 교훈은 그 반대의 이야기다. 상대에게 소중했던 나 자신, 그 시절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이다. 애도를 위해서는 그에 대한 마음뿐만 아니라 그에게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지울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유족에게 흔히 하는 실수가 ‘힘들어도 잊으라’는 말이다. 유족을 배려한 말이겠지만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그런 말을 들으면 화가 나고 상처받는다. “다 지난 일이야 잊어버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이러한 위로의 말에는 현재의 고통과 슬픔을 지우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당장 잊을 수 없는 사람을 어떻게 잊으라는 건가. 슬픔을 축소하려는 의도는 내 슬픔을 이해받지 못하는 불편함으로 다가온다. 애도를 위해서는 통념과 달리 잊으려 애쓰지 말고 반대로 기억해야 한다. 고인에 관한 말을 금기시하지 말고 유족이 원하면 얘기를 나누는 게 낫다. 애도 일기나 미처 부치지 못한 편지를 쓰고, 추억의 장소를 더듬으며 슬픔이 밀려오면 마음껏 우는 것이다.
사람들은 슬픔의 부정적인 내러티브를 불편해하는 경향이 있다. 슬픔은 어두우니까 빠져나와야 할 비정상의 상태라는 편견, 사람들은 슬픔의 해피엔딩을 원한다. 하지만 슬픔은 뭔가 잘못된 게 아니라 상실의 증거다. 사랑의 증명사진이다. 행복이라는 말조차 슬픔으로 균형 잡히지 않으면 그 의미를 잃는다. 세상에는 인생을 통째로 바꾸는 상실이 존재한다. 아내와 사별한 지 5년이 된 어르신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조금 전에 일어난 일처럼 여전히 아프고 고통스러울 겁니다.” 이 말에 어르신은 한참을 우셨다. “고마워요. 5년이나 지났는데 아직 그러고 있느냐는 말이 가장 큰 상처였어요.” 어르신께는 슬픔에서 벗어나라는 위로가 상처였다.
위로할 수 있으려면 공감이 전제되어야 한다. 위로가 불시착하는 흔한 이유는 공감이 아닌 동정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공감(empathy)은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이다. 상대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고 이해하는 것, 공감은 그를 이해하기 위해 나 중심의 스위치를 잠시 꺼두는 노력이다. 그에 반해 동정(sympathy)은 안쓰럽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동정은 주로 내 감정에 의존하기 때문에 상대의 아픔을 존중하고 개입하려는 노력은 부족하다. 결국 공감은 상대와의 연결에 연료를 제공하지만 동정은 종종 단절로 이끈다. 우리가 건넨 위로는 공감이었을까 동정 혹은 연민이었을까.
버스 옆자리에서 조용히 울고 있다. 눈은 마음을 적신 감정의 하수도, 눈물이 짠 건 고등어처럼 속마음에 염장했기 때문일까. 그저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면 된다. 마음이 아프다고, 널 아끼고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만, 묵묵히 네 곁에 있을 거라고. 위로는 슬픔을 극복하게 만드는 게 아니다. 위로는 상대의 고유한 슬픔과 아픔을 존중하는 데서 출발한다. 동백역에서 옆자리 자갈치가 내린다. 고생한 손이 내일이면 부기가 가라앉길, 날이 어두워지고 연말의 밤이 짜고 비리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