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조선시대 너튜브'는 바로 過客이었다고?

유석재 기자 2023. 12. 2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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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과객'의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김병연(김삿갓)의 표준 영정.

명색이 여당이면서도 배가 열두 척만 남았다며 (이순신 대신) 현직 법무부 장관을 영입하자고 울먹이는 소리가 어느 정도 통했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본 ‘열두 척’ 관련 자료가 생각이 납니다.

“왜구의 배 수백 척이 비늘처럼 이어져 바다를 가득 뒤덮으며 왔는데, 충무공은 배 열두 척으로 용감하게 나아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당시에 피란선 100여 척이 항구에 있었는데 충무공이 피란선들에 명해 후방에서 북을 치고 함성을 질러 기세를 돋우도록 했다. 마침내 크게 맞붙어 싸웠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왜구의 배 수백 척이 연이어 죄다 불탔고 왜구의 시체가 바다에 떠다녔다. 이에 개선가가 하늘까지 울려 퍼져 피란선의 남녀노소가 펄쩍 뛰며 춤추고 노래했으니 하늘과 땅의 풍경이 바뀌었다.”

1597년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과 관련된 새로운 기록입니다. 흥미로운 내용입니다. 명량해전 당시 민간인 피란선 100여 척이 이순신 휘하 조선 수군의 배후에서 응원을 했고, 우리 수군이 12척으로 왜군과 싸워 크게 이기자 함성을 지르며 기뻐했다는 생생한 전언인 것입니다.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보다도 훨씬 더 기쁜 환호였을 것입니다. 만일 조선 수군이 패했다면 그 뒤의 민간인 선박들은 곧바로 참화를 입게 되는 것이었겠죠. 명량해전은 여러 면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는 전투였던 것입니다.

영화 '명량'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이것은 1812년 순조 때의 기록입니다. 과연 믿을 수 있을까요? 이순신 전문가인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은 “이순신 장군이 민초들의 피란선 수백 척을 동원해 의병(疑兵·가짜 군사)을 만들었다는 내용은 임진왜란 당대의 인물인 오익창(1557~1635)의 ‘사호집(沙湖集)’에도 나온다”며 신빙성 있는 기록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순조 때 기록’인 이 새로 밝혀진 문헌의 정체는 뭘까요.

그것은 학계에 알려지지 않았던 야담집 ‘만오만필’이었고, 저자는 무명의 남인 선비 정현동(鄭顯東·1730~1815)이었습니다. 야담인데 무슨 신빙성 있는 얘기라고 하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겠습니다만, ‘야담’이란 야(野)에서 나온 담(談), 즉 들판이나 초야나 항간에서 떠돈 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언(傳言)이고 뉴스인 셈입니다. 유언비어(가짜뉴스)도 충분히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에는 일각의 사실을 담고 있는 내용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교차 검증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장희빈이 죽기 전 아들 경종을 폭행해서 성불구자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 나오지 않는데, 정말 그런 중대한 사건이 벌어졌다면 왕명을 받고 사약을 들고 간 의금부도사가 이것을 보고하고 사관이 그 내용을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에, 경종이 후사 없이 승하한 이후 후대에 꾸며낸 얘기로 봐야 합니다.

다시 ‘만오만필’ 얘기로 돌아가면, 이것을 발굴한 사람은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입니다. 대학생 시절이었던 1984년 여름 연세대 중앙도서관에서, 장서목록에도 없는 정체불명의 책 한 권과 마추쳤다고 합니다.

조선 야담집 '만오만필'을 번역한 안대회 교수가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학교 퇴계인문관 교수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김연정 객원기자

첫 장을 펼쳐서 봤더니 몰락한 양반 청년이 유리걸식하다 서울에서 과거시험을 보는데, 그를 꿈에서 본 서울 양반가의 도움을 얻어 마침내 커닝으로 급제했다는 기막힌 스토리가 적혀 있습니다. 이걸 적은 뒤 저자는 이렇게 한탄합니다. “아! 길흉화복은 모두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니 사람의 힘으로 어찌해 볼 것이 아니다.”

‘발견’ 37년 만인 2021년, 안 교수는 동료·제자 필자 14명과 함께 ‘만오만필’의 번역본(성균관대학교 출판부)을 출간했습니다. 조선 후기 194개의 기사가 실린 ‘야담과 실화’인 셈이죠. 역자가 붙인 제목 리스트만 봐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비렁뱅이의 출세기’ ‘천연두가 맺어준 인연’ ‘남편을 고발해 죽인 여자’ ‘김 첨지의 대를 이어준 과객’ ‘후취의 처녀성’ ‘보쌈당한 홀아비’ ‘도망한 노비의 딸’ ‘속아서 맺은 하룻밤 인연’ ‘음행 날조죄의 혹독한 처벌’ ‘진짜 남편과 가짜 남편’ 같은 겁니다. 신문 사회면 사건 기사나 ‘궁금한 이야기 Y’ ‘실화탐사대’에 나올 법한 이야기들 속에서 18~19세기의 밑바닥 사회상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관찬 공식 기록들 속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스토리들인 것이죠.

안대회 교수는 그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들로만 볼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재산 다툼이나 여성의 음행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은데, 기생이 돈을 많이 벌어 양반과 결혼하는 에피소드처럼, 이전 시대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지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심지어 말 타고 가는 선비를 농민들이 끌어내려 욕보이는 등 과격한 사건도 등장합니다. 조선 초만 해도 젊은 선비 황희가 멀리서 ‘여보시오, 검은 소와 누런 소 중에서 어느 소가 더 일을 잘하오?’라 물어보면 늙은 농부가 일부러 달려와서 친절하게 귓속말로 얘기해 주지 않았습니까. 세상이 달라진 겁니다.

‘만오만필’에 소개된 스토리들에선, 수백 년 조선왕조를 유지했던 신분제도와 윤리가 흔들리고, 여성의 지위가 변화하며, 정절 관념이 퇴색하는 등 사회가 빠르게 바뀌어가는 모습이 고스란히 포착된다는 것입니다. 안 교수는 “조선의 18세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 못지않게 격동기였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현동이 이 책을 쓴 것은 83세 때였습니다. 그는 ‘동사강목’의 저자인 실학자 안정복의 제자였습니다. 학문을 좋아했으나 평생 벼슬길에는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책에서 출세한 사람들에 대한 이중적인 시선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위에서 보듯 능력이 없는데도 편법으로 과거에 급제한 자들을 담담히 보며 운명론적 태도를 보이다가도, ‘역경을 꿋꿋이 견디며 재능을 지킨 사람들은 끝내 부와 명예를 얻는다’는 능력주의의 입장 역시 지니고 있었다는 겁니다. 지금 사람들이라면 그 나이가 돼서 과연 둘 중 어떤 입장을 지니게 될까요? 판단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저자 정현동은 그 많은 이야기들을 어디서 듣고 접했던 것일까요?

…정답은 바로 ‘과객(過客)’이었습니다.

전북 김제의 장석보 종가. 오가는 과객들이 부담 없이 머물던 곳이다. /조선일보 DB

정현동이 살던 곳은 서울과 남쪽 지방을 잇는 길목인 경기도 광주였습니다. ‘이리 오너라... 지나가는 과객이온데 하룻밤 신세를 질 수 있겠소?’라는 대사로 온갖 사극에서 익숙하게 등장했던 과객. 이들은 숙식비 대신 어떤 대가를 치르고 하룻밤을 묵어갔던 걸까요? 술상을 앞에 놓고 집주인과 어떤 대화를 나눴던 걸까요?

바로 ‘세상 돌아가는 일’이었던 겁니다. 안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시의 과객은 집주인에게 세상일을 전파하는 기자, 블로거, 유튜버의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만오만필’이 나름대로 사료적 가치가 있는 문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오래 전 이문열의 단편소설 ‘과객’에서 비슷한 얘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만, 이 얘기를 학자로부터 들으니 새삼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조금 과한 해석 같기도 합니다만, 강원도 영월의 김삿갓문학관에서는 과객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에 과거제도의 문란 등으로 인해 시대 상황이 혼란스러워지면서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가세가 기운 지식인 일부를 중심으로 이른바 ‘과객’이라 불리는 계층이 형성됐다. 김삿갓도 이러한 과객에 속하는 방랑시인 중 한 사람이었다.”

예전에 저는 근대사의 주요 사료 중 하나인 ‘매천야록’에 대해 궁금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저자인 황현(1855~1910)은 평생 고향집에 은거하다가 경술국치 때 자결한 시골 선비인데, 어떻게 그 방대하고 깊은 정치사의 온갖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던 걸까요? 예를 들어 한성순보가 거기까지 배달망이 미쳤을 리도 없는데 말입니다. 이제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정보들을 알려주는 과객들이 존재했던 것이죠. 그런 ‘정보 전파자’의 고객은 예전엔 지방의 양반집이었고, 지금은 일반 대중으로 확대된 셈입니다. 지금 유튜버들이 예전 과객과 비교해 얼마나 신뢰도를 지니고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지만 말입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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