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수의마음치유] 우리 모두의 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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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우울증 약을 드셔보신 적 없어요?" 환자는 당연히 내가 항우울제를 복용해 봤을 거라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몸과 마음이 다 무거워서 꼼짝하기 힘들 테지만, 그래도 움직여야 해요. 가만히 있으면 나쁜 생각이 더 떠올라서 편히 쉴 수도 없어요. 나는 우울하면 많이 걸어요. 안 가본 골목길을 찾아 걷기도 하고, 평소라면 차 타고 지나갈 도로를 두 발로 걸어요." 이렇게 말하면 기운 없는 환자가 압박감을 느끼겠지만, 그래도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자괴감만 키우고 있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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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시간 극복할 자신만의 방법 찾아야
그런데 내 앞날은 나도 알 수 없는 법. 그 환자에게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언젠가 저도 먹어야만 할 날이 올 수도 있겠죠. 무기력하고 초라한 내가 싫은데도 꾸역꾸역 하루를 살아야만 하고, 그렇게 애쓰며 살고 있는데도 사는 의미가 느껴지지 않아서 절망하게 되면 항우울제를 꼭 먹을 거예요.”
불행이 나를 후려치고 있는데도 현실에 묶여 꼼짝달짝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땐 하루 종일 잠만 자고 싶었다. 나쁜 일이 하나도 없는데 아침부터 ‘아, 오늘은 왜 이렇게 힘들지’라며 수렁에 빠진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이렇게 계속 힘들면 내가 나를 우울증이라고 진단해도 되겠구나’라고 느낀 적은 있지만 그래도 항우울제로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 하진 않았다. 몇 번의 고비와 가끔씩 찾아왔던 우울한 나날을 아직까지는 내 힘으로 떨쳐내 왔다. 걷고, 뛰고, 음악 듣고, 책 읽고 버티다 보면 우울은 시간의 물결을 따라 저멀리 떠내려가곤 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우울증을 날려버릴 만큼 격렬하게 뛰기가 점점 어려워질 거고, 내 뇌의 기쁨 회로는 젊을 때만큼 쌩쌩하게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
이런저런 항우울제를 다 처방해 보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무기력과 무감동이 나아지지 않아 애를 먹고 있는 우울증 환자 한 명이 있는데, 그이의 표정이 진료가 끝난 후에도 간유리에 반사된 이미지처럼 떠오르며 ‘내가 치료를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 괴로웠다.
의사가 모든 환자를 낫게 해줄 순 없다. 이런 사례는 늘 있다. 그런데 이 환자가 일으킨 감정의 여운은 유독 길고 깊었다. 동년배인 데다가 지방에서 태어나 세속적으로만 보면 남들이 선망하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남자라는 속성이 비슷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나도 한때 그런 적이 있었잖아’라며 우울증에 걸린 그에게서 과거의 나를 봤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다 무거워서 꼼짝하기 힘들 테지만, 그래도 움직여야 해요. 가만히 있으면 나쁜 생각이 더 떠올라서 편히 쉴 수도 없어요. 나는 우울하면 많이 걸어요. 안 가본 골목길을 찾아 걷기도 하고, 평소라면 차 타고 지나갈 도로를 두 발로 걸어요.” 이렇게 말하면 기운 없는 환자가 압박감을 느끼겠지만, 그래도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자괴감만 키우고 있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
그이의 고통이 내 경험치보다 훨씬 커서 그럴 수도 있고, 내 지난 아픔을 과장되게 기억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나는 고통에서 빠져나왔고 그는 그러지 못했다. 내가 정신의학 전문가이거나 멘탈이 강해서 그럴 수 있었던 게 아니다.
그저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서로 다른 시간대에 겪었던 것이고, 인생에 평온이 찾아온 시기 또한 달랐기 때문에, 그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고 나의 그것은 과거완료형인 것일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모든 우울은 반드시 지나가므로 고통의 시간도 언젠간 끝날 텐데, 다만 우리는 그때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
김병수 정신건강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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