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계약의 비계약적 요소
강사 퇴직금 문제로 대학가가 시끌벅적하다. 2019년 8월 강사법(고등교육법 개정안) 시행 이후 3년 고용 기간이 끝나면서 퇴직금 문제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강사의 교원 자격을 인정한 강사법에 따르면 대학은 강사와 1년 단위로 계약을 맺어 임용하고 3년간 재임용을 보장해야 한다. 강의담당 시수는 6시간 이하로 제한하며, 특별한 경우 학칙으로 정할 때만 9시간까지 늘릴 수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근로기준법의 퇴직금 지급 규정이다. 사용자는 근로자에게 퇴직금을 지급해야 하는데, “다만 계속근로기간이 1년 미만인 근로자, 4주간을 평균하여 1주간의 소정근로시간이 15시간 미만인 근로자에 대하여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이 규정을 그대로 따르면 6시간 강의하는 강사는 퇴직금을 받을 수 없다.
2012년 12월 의정부지방법원은 시간강사의 근로시간을 1주당 강의시간과 함께 그 2배의 강의 준비 시간까지 해서 3배로 보아야 한다고 판결한 바 있다. 이렇게 되면 6시간 강의하는 강사는 그 3배인 18시간을 근로한 셈이 되어 당연히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 강사법 시행으로 6시간 강사에게 퇴직금을 주는 것이 일반화될 상황에 처한 것이다. 추가 재정부담을 떠안게 된 대학이 불만을 표출하자, 교육부가 ‘강사처우개선사업비’를 지원했다. 이마저도 3+1년 한시적인 지원이라 올해 중단되었다. 대학들은 앞다투어 강사를 몰아내는 한편, 남은 강사의 강의시수를 4학점 미만으로 줄였다. 3배를 해보아야 12시간밖에 되지 않으니 당연히 퇴직금 지급대상에서 빠지게 된다는 셈법이다.
2023년 1월 서울고등법원 판결은 불안정을 증폭시켰다. 국립대학의 비전업 시간강사들이 전업 시간강사와 달리 차별을 받았다며 미지급된 연차휴가수당 및 주휴수당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판사는 주당 강의시간이 12시간 미만인 비전업 강사의 경우 근로기준법상 15시간 미만 근로자라 연차휴가수당 및 주휴수당을 줄 필요가 없다고 판결했다. 강의시수에 3을 곱하던 기존 하급판례를 뒤집었다. “원고들 대부분은 같거나 유사한 강좌를 여러 차례 반복하여 강의해 왔으므로, 강좌의 강의, 시험 출제 및 채점 등에 관하여 상당한 정도로 숙련되어 있었으므로, 위 강좌에 대한 강의준비 및 학사행정업무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임.” 원고들은 즉각 항소했고, 최종결정은 대법원에 넘겨졌으며, 미래는 더욱 불투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생존전략에 몰두하는 대학만 마냥 비판하고 있을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서울고등법원 판결이 노출한 강사에 대한 낮은 사회적 인정이다. 반복적인 강의를 통해 획득한 학사업무의 높은 숙련도는 계약서에 명시된 강의시수를 넘어 3배를 곱할 필요가 없게 만든다. 계약서에 명시된 강의시수만 근로시간으로 인정하면 된다. 철저하게 법 형식주의에 기댄 판결이다. 의아함이 생긴다. 판사도 반복적인 판결을 통해 높은 숙련도를 쌓고 이를 토대로 매번 유사한 판결을 내리지 않는가? 어지간한 사건 판결은 수없이 되풀이된 사례를 통해 이미 패키지화되어 있다. ‘판결 시수’만 근로시간으로 인정해 임금을 줘도 되는 ‘시간 판사’를 쓰면 되는데, 왜 굳이 비싼 혈세로 전업 판사를 고용하는가?
법 형식주의에만 기대어 계약을 해석하면 이런 논리적 곤경에 처한다. 사회적 삶에서 진짜 문제는 계약 그 자체가 아니라 계약의 도덕적 토대다. 사회학자 파슨스는 이를 ‘계약의 비계약적 요소’라 부르는데, 핵심은 ‘가치’다. 강사의 시수가 계약서에 적힌 그대로인 이유는 반복적 업무를 높은 숙련도로 쉽게 할 수 있어서가 아니다. 한국 사회가 강사의 사회적 가치를 얕잡아 보기 때문이다. 맞다. 강사는 비정규 노동자다. 하지만 대학이 키워낸 학자이자 교육자이기도 하다. 강의시수 따져가며 대학에서 몰아내면, 결국 학문장이 붕괴한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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