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겨울밤 노란 귤처럼
겨울은 추워야 제맛이라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팔자 좋은 소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렸을 때는 초겨울이 되어 아침 세수에 피부가 뻣뻣해지면 우울증이 올 지경이었다. 당도할 겨울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없는 사람에게 겨울처럼 두려운 것이 있던가. 경제를 일구는 일은 부모님 몫이었지만 없는 집 아이들은 일찍이 마음부터 힘겨운 살림을 살았다. 아버지가 연탄 살 돈이 있는지, 김장은 충분한지, 마지막 학기 등록금은 제때 낼 수 있는지 가늠을 하고도 남았다. 그때 몇년은 중동에서 전쟁이 나서 기름값이 올랐다. 박정희의 경제 드라이브로 오르던 총생산도 고개를 처박았고 어른들은 나라가 사네 마네 걱정을 했다. 수학이나 열심히 풀고 영어 단어 외워야 할 때 왜 그런 어른들 고민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까. 고약한 등유 타는 냄새가 외려 반갑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쓰지도 않는 말인 고학생은 왜 그리도 많았는지. 신문을 팔고, 군고구마 깡통을 지켰으며, 늦은 밤에는 메밀묵 상자를 멨다. 몇년씩 같은 교련복을 입고 메밀묵을 파는 청년이 마을을 돌았다. 그는 고등학교가 3년제라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고 5년이고 6년이고 같은 교련복 차림에 메밀묵을 외쳤지만 아무도 그에게 뭐라 하지 않았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에 관대하던 사람들이 살았다. 아버지는 어제 불렀던 그를 오늘도 불러 메밀묵을 시켰고, 추운 날씨에 고생 많다는 말씀과 몇푼씩 팁을 얹어주었다. 내게는 아무 맛도 없는, 김장김치라도 척척 걸쳐야 그나마 넘어가던 그 무심한 메밀묵은 이제 맛을 알 만한데 어디에도 파는 이가 없다. 천지가 고층 아파트라 설사 누가 메밀묵 목판을 들고 나선들 그 외침을 들을 수 있을까.
마을 입구에는 강추위에 벌벌 떨며 이른바 ‘군고구마장수 모자’라고 부르던 귀달이 모자를 쓰고 검게 물들인 군복 야전상의를 두껍게 입은 젊은 사내들이 과일을 팔았다. 이미 국광 같은 재래 사과를 큼직한 ‘부사’가 대체하던 시기였다. 부사는 어찌나 달고 시원하던지. 부사랑 귤을 실컷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 좌판이나 리어카판에서 어떤 사내는 겨울이니 귤을 다뤘다. 카바이드등 아래 노랗게 황금처럼 빛나던 귤은 먼 제주, 남국에서 왔다. 그 무렵만 해도 귤은 비싸서 쉬이 먹을 수 없었다. 누런 시멘트 봉지에 다섯 개나 열 개쯤 담아 팔던 귤의 맛을 어찌 잊으랴. 껍질조차 알뜰하게 모아 차를 우리던 그 추운 겨울을 또 어찌 잊으랴. 윗목에 둔 자리끼 물이 얼어버리던 혹한에 연탄불 땐 방에서 모란이 그려진 빨간 담요를 덮고 온 식구가 귤을 까먹던 밤은 그나마 덜 서러웠던 것 같다.
요즘 북극 냉기가 한반도를 덮치고 누군가는 또 추위에 우울해질 것을 생각한다. 그래도 봄이 틀림없이 온다는 생각 하나로 견뎌왔던 시간이 있었다. 날씨에 무감해지는 시대라지만, 겨울은 춥고 그래서 다가올 봄이 더 간절해진다. 봄은 무엇이든 바꾸는 계절이니까.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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