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기자생활] 국민들께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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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께 죄송합니다. 앞으로 다른 길로 사람들 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언뜻 중대산업재해를 일으킨 기업 대표나 정부 책임자가 했을 법한 발언을 산재 사망자 유족이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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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기자생활]
장현은 | 노동교육팀 기자
“국민들께 죄송합니다. 앞으로 다른 길로 사람들 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언뜻 중대산업재해를 일으킨 기업 대표나 정부 책임자가 했을 법한 발언을 산재 사망자 유족이 꺼냈다. 지난 7일 대법원에서 고 김용균씨 사망사건 관련 최종 판결이 난 뒤였다. 2018년 12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하청노동자 김용균씨 죽음 이후 원청 책임을 강화하는 내용의 산업안전보건법 개정과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이 이뤄지는 등 김씨는 중대재해 근절을 위한 발걸음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날 서울 서초동 대법원 1호 법정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는 눈을 질끈 감으며 얼굴을 찡그렸다가 이내 차분하게 굳은 표정을 짓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주문이 낭독된 20초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김씨 5주기를 기리는 추모 기간에 열린 이 재판에서 대법원은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는 아홉 글자 선언으로 원청 한국서부발전과 당시 대표이사의 무죄를 확정했다. 어머니 김미숙씨와 동료들, 그리고 이들을 지지한 많은 시민과 함께해온 5년이란 시간은 그렇게 끝났다.
선고 이후 대법원 앞에서 울려 퍼진 이 반성의 목소리 주인공은 원청 한국서부발전 대표도, 하청 한국발전기술 실무자도 아닌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였다. 아들의 5주기를 사흘 앞두고, 그 죽음의 가장 큰 피해자랄 수 있는 어머니가 ‘국민들께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법정을 채 다 나서지도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은 김미숙씨의 얼굴에 올해 봤던 많은 얼굴이 겹쳐 보였다. 20년간 기다린 노조법 2·3조 개정안이 겨우 국회 문턱을 넘었다가 대통령 거부권 행사로 무산됐을 때 어느 노동자의 허탈해하던 얼굴, 7년째 기다리던 정규직 전환이 올해 안에 성사되기를 요구하며 35일째 단식을 하던 이은영 공공운수노조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지부 지부장의 푸석한 얼굴, 1주기 인터뷰를 위해 마주했던 에스피엘(SPL) 빵공장 끼임 사망 사고 노동자 박선빈씨 어머니의 쓸쓸한 얼굴도.
노동담당 기자로 꽉 채운 1년을 보내고 한해를 뒤돌아보니, 내 기사의 주인공은 늘 이런 절망하는 노동자들이었다. 연초 주 69시간 근로시간 유연화 추진 논란에 이어 건설노조 간부와 택시노동자의 분신이 있었고, 코스트코에서 카트를 나르다가, 샤니 제빵공장에서 기계에 끼여 숨진 노동자 등 사고와 크고 작은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제대로 된 응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추진하던 정책이 논란 끝에 좌초해도, 중대재해처벌법 흔들기 기조 속 중대재해가 반복돼도 책임 있는 이의 제대로 된 사과는 한번도 없었다. 노조법 개정안을 포함해 대통령이 국회 통과 법안 6건에 거부권을 행사했을 때도, 김준영 금속노련 사무처장에 대한 경찰 폭행으로 노사정 대화가 단절됐을 때도, ‘건폭몰이’의 끝에 “나는 죄가 없다”며 건설노동자가 분신했을 때도.
그런 한해를 마무리할 즈음 “국민들께 죄송하다”는 사과가 중대재해로 아들을 잃은 유족의 입에서 나왔다는 아이러니다. 지난해 12월 데자뷔처럼 노란봉투법은 다시 해를 넘긴다. 대신 중대재해처벌법 5인 미만 사업장 적용 유예가 추진되고 있다. 이대로라면 내년도 사과할 사람이 사과하지 않고, 반성할 사람이 반성하지 않는 한해가 되진 않을지. 2023년 올 한해를 보내는 마음이 씁쓸하기만 하다.
mi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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