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를 낫게 하는 2가지 조건…15세 피카소는 알고 있었다
피카소 1897년 작품 '과학과 인정'
맥박 재는 의사, 환자 보듬는 수녀…
환자 중심으로 오른쪽·왼쪽에 배치
'과학의 영역'과 '인정의 영역' 상징
"좋은 의료란 두 영역 골고루 섞여야"
지난달 가족 중 한 명이 아파 입원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병원에 오가며 나름대로 심적인 보조를 하는 데 최선을 다했지만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건강을 되찾을 수는 있을지, 병으로 생긴 신체 변화로 인해 환자가 자존감에 타격을 받지 않을지, 정서적으로 우울하거나 희망을 놓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는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웠다.
이때 크게 위안이 된 것은 의료진의 능력과 태도였다. 적절한 약을 투여하고 신체 반응의 추이를 지켜본 주치의는 의학적 조치 내역을 이해하기 쉬운 말로 보호자에게 설명했다. 의사 및 간호사 등 모든 스태프는 친절하고 따스하게 환자를 대하고 보호자의 어지러운 마음을 토닥였다. 그 덕분에 환자는 잘 회복해 퇴원할 수 있었다.
안도할 수 있게 된 지금, 이 과정에서 문득 떠오른 그림이 있다. ‘과학과 인정(人情·Science and Charity)’(1897)이란 유화다. 이를 매개로 ‘좋은 의료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거대한 규모의 캔버스에 작고 소박한 실내 공간이 사실주의적으로 그려져 있고 공간을 가로지르며 침대가 놓여 있다. 그 위엔 병색이 짙은 환자가 힘없이 누워 있다. 환자의 오른쪽엔 의사가 앉아 시계를 들여다보며 환자의 손목을 잡고 분당 맥박 수를 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건너편엔 가톨릭 수녀가 서 있는데 한손으로는 아기를 안고 다른 손으로 따뜻한 차를 환자에게 건네고 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누구일까. 다름 아닌 ‘현대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다. 입체파였던 그에게 언제 이렇게 공간과 인물을 유려하게 표현하던 시기가 있었는가 싶다. 이 작품은 피카소가 15세일 때 그린 것이다.
피카소는 스페인 말라가라는 마을의 성공하지 못한 화가 아버지와 쾌활하고 다정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동기에 이미 피카소의 소묘 실력은 미술 학교의 학우들뿐 아니라 아버지를 능가했다고 한다. 통상적인 미술 교육을 받던 아동기와 10대 시절엔 피카소도 당대 화단이 요구하던 사실주의 화풍을 견지했다는 얘기다.
‘과학과 인정’은 당시 말라가 지역 미술전 금메달을 수상했다. 마드리드 순수예술전에서 ‘선외 가작’으로 선정됐을 만큼 빼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은 수작이다. 이 작품은 말라가에서 전염병이 유행하던 시기 피카소가 그린 질병 관련 주제의 세 작품 중 하나다. 시리즈의 남은 둘로는 1894년작 ‘환자’와 1899년작 ‘마지막 순간’이 있다. 1895년 피카소가 아끼던 여동생 콘치타가 일곱 살 어린 나이에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고 또 다른 어린 여동생도 콜레라로 목숨을 잃었다.
이런 개인적 경험이 피카소로 하여금 병, 환자, 의사, 치료 등의 의학적 주제에 관심을 갖게 했을 것이다. 피카소의 ‘과학과 인정’은 병상에 누워 있는 환자인 여성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의사와 수녀를 배치한다. 이들의 세계가 과학의 영역과 인정의 영역으로 양분돼 있음을 보여준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태도로 병증을 다루고 있는 의사는 시계에 시선을 고정한 채 환자의 손목에서 맥박을 재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의사와 환자가 시선 교환 등 정서적 교류를 일절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토마스 쿠튀르의 ‘병든 광대’와 같은 예시처럼, 환자로부터 고개를 돌린 채 진료하는 의사의 도상은 실증주의적 태도와 감정적 무관심을 동일시해 ‘과학적 권위’를 부여하는 의도로 종종 사용되던 것이다.
피카소가 참조한 걸로 알려진 스페인 작가 루이스 아란다의 ‘병동 회진’ 또한 비슷한 도상을 보여준다. 잿빛 피부색의 환자 주변에 있는 정장을 입은 남성 무리는 회진을 도는 의사와 수련생이다. 담당의는 환자의 등쪽에서 숨소리를 듣고 있고 환자의 정면에 앞치마를 한 간호사들 너머 수련의들은 환자의 병세를 관찰하거나 상태를 꼼꼼히 기록하고 있는데, 의사들은 모두 병증 자체를 과학적으로 대할 뿐 누구도 환자의 표정을 살피는 법이 없다.
그런데 피카소는 이와 더불어 연민, 공감, 인정을 갖고 환자를 돌보는 수녀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수녀는 한손으로 아이를 번쩍 들어 아이 어머니에게 보여주면서 따스한 미소로 환자를 안심시키는 한편 다른 손으로는 증세 완화에 도움이 될 만한 따뜻한 음료를 권하고 있다. 환자나 보호자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제공하는 존재로 수녀를 등장시키는 것은 또 다른 스페인 화가인 파테르니나의 ‘병상을 찾은 어머니’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란 기록이 있다.
15세의 피카소가 ‘과학과 인정’을 통해 제안한 좋은 의료의 방향성은 현대 의학에서도 유의미하다. 전통적인 의료 문화는 ‘질병 중심’이었다. 의사가 대화를 주도하고 환자 진료에 대해 모든 결정을 내리는 방식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환자와 보호자는 “의사가 환자를 물건처럼 취급하고 존중하지 않는다”는 불만을 가져온 게 사실이다.
요즘은 ‘환자 중심 의료’의 가치가 점점 주목받고 있다. ‘환자 중심성’은 환자 개인의 선호, 필요와 가치를 존중하고 그에 맞는 진료를 제공하는 게 핵심이다. 얼핏 들으면 마치 도덕 교과서와 같은 추상적이고 공허한 개념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의료인이 환자와 가족의 선택을 존중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의사 결정과 돌봄에 그들을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게 보다 좋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공감대는 점점 커지고 있다.
지금의 의사들이 피카소 그림 속 간호사나 수녀의 이미지처럼 인정의 영역까지 발을 넓힐 수 있을까. 의료계에 이 모든 걸 요구하는 건 힘든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환자를 단순히 ‘병을 가진 사람’으로 보는 전통적 시선을 버리고 병이 있기 전의 ‘한 사람’으로 보려는 노력이 진정한 인술(仁術)의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오범조 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 부교수, 오경은 상명대학교 미술사학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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