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하기보단 담담하게···김윤석이 연기한 이순신의 최후[인터뷰]
‘용장’ ‘지장’에 이은 ‘현장’으로 표현
왜의 완전한 항복 구한 고집
시대를 앞서간 현명함 보여줘
‘이순신 3부작’의 마지막인 <노량: 죽음의 바다>는 이순신의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영화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영웅의 마지막 순간과 유언을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 여기 이 영화의 성패가 걸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량>의 선택은 ‘더하기’보다 ‘빼기’였다.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배우 김윤석(56)은 이순신의 마지막 순간을 비장하기보다 담담하게 재현하는 데 자신의 몸을 썼다. 지난 20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김윤석은 이순신의 죽음을 위대한 영웅이 아닌 고독했던 한 인간의 죽음으로 봤다고 했다.
“아비규환의 전쟁터에서 맞는 죽음입니다. 위대한 영웅의 죽음을 위대하게 묘사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400년 전 이 땅에 있었던, 7년의 전쟁에서 군인으로 생을 살다 전장에서 사라져간, 불행했던 50대의 죽음이어야 했습니다. 감독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실되게 표현하자’는 것이었죠.”
4년 전 모로코에서 <모가디슈>를 촬영할 때 <노량>의 시나리오를 받았다. 밀도 높은 시나리오였다. 명나라가 개입하며 벌어지는 전반부의 국제 정치가 무엇보다 재밌었다. 그러나 ‘국민 배우’의 타이틀을 오래전 얻은 그에게도 이순신이라는 국민적 영웅은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럼에도 해야 한다면 그의 마지막 순간을 그린 <노량>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노량>에는 많은 것이 담길 수밖에 없습니다. 호쾌한 승리도 있지만 7년이나 이어진 전쟁의 끝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하죠. 이왕 도전한다면 많은 드라마가 밀도 있게 필요한 작품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김윤석은 앞서 이순신을 연기한 최민식, 박해일에 이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 타자다. 불처럼 뜨거웠던 최민식의 이순신, 고요한 바다 같았던 박해일의 이순신과는 달라야 했다. 김한민 감독은 <명량>과 <한산>의 두 장수를 각각 ‘용장’과 ‘지장’으로 표현했다. <노량>의 이순신은 ‘현장’이다. 김윤석은 ‘완전한 항복’으로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이순신의 고집이야말로 그의 현명함을 보여준다고 했다.
“장군님은 육지에 대한 섬나라의 열망을 읽었습니다. 다시 발붙이지 못하게 완전한 항복을 받아야 한다는 장군님의 결론이 가장 현장의 모습이 아닐까요. 실제로 (일본이) 적어도 300년 동안은 못 왔으니까요.”
영화 말미 이순신이 병사들을 독려하며 북을 치는 장면은 그의 현명함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한편, 이 영화의 백미이기도 하다. ‘둥둥’ 하는 북소리는 관객의 마음을 깊고 진하게 울린다. 김윤석은 이 장면을 위해 북 치는 연습을 수없이 반복했다. “당시 북소리는 진격의 소리입니다. 전쟁의 아비규환 속에서 아군에게 들려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감동을 주기 이전에 논리적으로 정확한 선택이에요. 정말 중요한 장면이죠. 그런데 북 치는 자세가 잘 안 나와요. 몸이 휘청휘청 끌려가거든요. 어깨나 갈비뼈에 담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김윤석은 역사에 박식했다. 인터뷰 도중 그는 임진왜란은 물론이고 병자호란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줄줄 외웠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맞닥뜨린 딜레마, 당시 전국적으로 활약했던 곽재우 등 의병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감독님이 보내주시는 자료를 많이 읽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기록들을 단순히 외우는 게 아니었어요. 당시 사회적인 상황, (이순신이 가진) 삶의 가치 같은 것들을 (연기와) 어울리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신분제 사회였기에 노비 병사도 있었는데 장군님은 노비 병사의 시신까지 수습해 고향에 보냈다고 합니다. 그만큼 철저히 예의와 도리를 지키는 분이었던 거죠.”
김윤석은 10년간의 ‘이순신 프로젝트’를 마친 김한민 감독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했다. “<명량>에서 <노량>까지 10년이 걸렸지만 자료를 조사하고 기획하는 과정을 합치면 20년은 걸렸을 겁니다. 대한민국에서 김한민만큼 이순신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툭 건드리면 다 나올 정도거든요.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어요. 어마어마하게 질리기도 하지만요(웃음).”
김윤석은 성공적으로 데뷔한 감독이기도 하다. 그는 <미성년>(2019)으로 호평을 받으며 뛰어난 연출자로서의 재능을 보여줬다. 감독의 눈을 지닌 김윤석은 <노량> 촬영 현장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다. “저는 캐릭터나 드라마로 영화 만드는 걸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번에 시각특수효과(VFX)를 보면서 저런 전문가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표현의 범위가 좁아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파트너십이 아주 중요한 시대니까요. 이제는 감독 한 명이 뛰어나서 좋은 작품이 나오는 시대는 지났죠.”
김윤석에게 좋은 영화란 ‘사람이 보이는’ 영화다. “사람의 삶이 보이는 영화가 좋은 영화입니다. SF장르라 할지라도 보고 나서 사람의 삶이 보여야 좋은 영화예요. <노량>은 400년 전 일어난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지금 우리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영화라 생각합니다.”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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