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편견없는 시선으로 고정관념 깨트리고 작품만을 바라보는…
영화와 잘 어우러져… 평가 받아
無에서 시작한 창작음반 'Listen'
자기 얘기만 하는 사람들을 노래
국악과 서양음악의 '경계'를 없애
다양한 장르 섞인 깊은 세계 구축
월간객석과 함께하는 문화마당 작곡가 정재일
여러 사람에게 정재일이라는 음악가를 언제, 어떤 경로로 접했는지 물어보면 답변이 천차만별이다. 세기말의 밴드 '긱스'(1999년 데뷔)의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던 천재 소년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있노라 하면, 드라마 '오징어게임'(2022)의 리코더 음악으로 알려진 'Way Back Then(그땐 그랬지)'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든 공통되는 반응은 그의 음악은 그것이 사용될 때의 풍경(혹은 화면)과 놀랍도록 부합된다는 것.몇 해 전 영화 '기생충'(2019)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 그의 음악에 관한 논의가 크게 일어난 것을 기억한다. 영화를 위해 작곡한 '믿음의 벨트'는 이른바 '가짜 바로크 음악'이란 별칭으로 주목 받았는데, 현악 오케스트라를 사용한 이 곡은 마치 역사 속에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바로크 음악인 듯 자연스럽다. 주인공 일가가 사기로 상류층 가정에 잠입하는 것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거짓을 고발하고, 영화의 결말인 그들의 몰락까지 암시한다. 작곡가가 어디까지 계산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음악학자·평론가 등은 청각 정보로 사회계층을 분리해 내는 그의 음악을 놓고 '음악이 표현할 수 있는 범위'에 대해 재고해 보곤 했다.
◇영상 작품과는 또 다른 묘미
정작 그는 자기 음악 세계의 '아카데믹'한 특징을 꽤 부정한다. 그가 데뷔 시절부터 꾸준히 나눠온 인터뷰에선 '대학을 나오지 않아' '근본 없는' 등의 말로 자신을 지칭한다. 성공한 예술가가 가진 의외의 낮은 자존감이나 지나친 겸손일까? 그러나 작품에 관해 상세하게 설명하려는 모습에선, 자신이 만든 작품에 분명한 확신을 지닌 것이 보였다. 덕분에 특정 사조나 계보를 잇지 않는 그의 '근본 없음'은 실상 '선입견 없음'에 더 가까워 보인다.
"중학생 때 서울재즈아카데미를 다닌 후, 그 뒤로는 학교를 안 다녀서 고등교육에 굉장히 목말라 있었습니다. 지금도 자신이 없어지는 순간이 올 때, 교육을 받았다면 더 나았을지 여전히 의문을 가져요. 그렇지만 이렇게 근본 없이 음악을 해도 때마다 맞는 어법을 찾아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마다 맞는 어법'에는 공연도 예외가 없다. 지난 15·16일에 열렸던 그의 공연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그중 하나는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에 등장한 영상음악이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은 커다란 스크린을 갖추고 있고, 두 작품 모두 크게 흥행하여 작품의 장면을 그대로 사용해도 될 테지만, 장소에 맞는 음악을 제작하는 게 장점인 그는 두 음악에 다시 손을 댔다.
"기존에 있는 영상을 사용해도 좋겠지만, 그것은 이미 기록이 되어 있잖아요. 이번에는 음악만으로 공연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더 큽니다. 영화의 구성과는 다르게, 여러 곡의 조합으로 메들리를 만들어서 새로운 기승전결의 드라마가 느껴질 수 있도록 연출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사람들이 아는 작품을 한 곡씩 선보이는 게 아니라, 20분간 이어지는 메들리 자체가 한 작품이 될 수 있도록 신경 썼어요."
◇온전한 그를 들어보다
정재일에게 올해 2월에 발매한 음반 'Listen'은 새로운 도전과도 같았다.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의 해외 흥행에 힘입어, 데카 레이블에서 음반 제작 제안이 왔던 것. 제작된 영상, 무대와의 협업을 주로 해온 그에게 무(無)에서부터 시작하는 창작의 경험은 생각하는 소리를 '진정으로' 담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기생충'이나 '오징어게임'으로 그를 알게 된 이들에게 이 음반은 퍽 낯설게 다가온다.
"음반 이름을 'Listen'으로 지은 것은 지구촌이 겪는 상황과 관련이 있어요. 팬데믹·전쟁·기후 위기가 가져온 수많은 작별을 바라보며,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 생각했죠."
리코더 소리를 귀에 꽂아버리던 드라마 삽입곡과 다르게, 'Listen'의 음악은 공격적이지 않고 잔잔하게 흐른다. 30분을 조금 넘는 7개의 트랙은 마치 하나의 작품처럼 연결된다. 이렇게 완성된 그의 정체성은 이번 공연의 두 번째 축을 담당하게 됐다.
◇'우리 것'에 내린 단단한 그의 뿌리
앞서 이야기한 그의 '선입견 없음'을 다시 꺼내와서,스스로 장르를 정의하지 않는 정재일의 음악은 덕분에 뮤지컬·영화·무용 등 다양한 분야로 퍼져나고 있다. 그중 오랫동안 시간과 마음을 쓴 분야는 전통음악이다. 그는 19세에 국악 그룹 '푸리'에서 활동했고, 여우락 페스티벌에서 여러 국악 연주자와 무대에 올랐으며, 올해 11월에 발매한 디지털 음반 'A Prayer'에서는 진도씻김굿·비나리 등을 재해석하여 수록했다. 판소리 '적벽가'의 눈대목인 '자룡, 활 쏘다'에 피아노를 더한 무대는 판소리가 가진 '장단'과 서양음악의 '장단'을 경계 없이 결합한 작품이다. 어느 분야에 속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없어 장르를 잊고 오직 작품에만 집중하게 만든다. 그렇게 전통음악은 이번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무엇보다도, 전통음악을 예술 소비자로서 좋아합니다. 아주 꼬마 때부터 사랑에 빠졌어요. 깊이 들어가 보면 그 안에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게 30년 정도가 지나서 저의 주변인도 국악인이 많아요. 영화나 드라마, 무대 작품을 만들 때도 그런 요소를 지속적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이번 공연에도 공식적으로 초연하는 작품에 전통음악 요소가 들어가 있으며, 20년 넘게 저와 함께 해온 전통음악 연주자들이 무대에 오릅니다."
총 2시간에 달하는 공연에는 위와 같은 정재일의 다양한 활동과 생각이 담겼다. 그가 섭렵한 장르가 워낙 다종다양하다보니 공연은 잘못하면 난잡한 총집합이 되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했다. 그러나 공간과 풍경에 부합하는 음악을 만들어 온 그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잘 아는 음악가다.
글= 객석 이의정기자
사진= 세종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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