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 사건, 40년 만에 국가 손해배상 책임 첫 인정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26명에게 국가가 손해배상 비용을 지급하라고 승소 판결이 난 21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3.12.21 한수빈 기자

“원고들이 강제수용되면서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었을 것으로 보이고….”

21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동관 452호 법정. 재판장이 판결문을 읽어내려가자 두 손을 모은 채 법정을 바라보던 이채식씨(54)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황정복씨(57)도 나지막하게 탄성을 내뱉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선고가 마무리되자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이씨는 “아픈 기억만 가지고 살아온 우리에게 더 살아갈 기반을 줬다”고 말했다.

법원이 ‘한국판 아우슈비츠’라 불릴 만큼 인권유린이 자행된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들에 대해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9부(재판장 한정석)는 이날 피해자 26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는 피해자에게 수용 기간 1년당 8000만원을 기준으로, 개별 사정을 고려해 1억원 범위에서 가산한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피해자들은 적게는 8000만원에서 많게는 11억2000만원의 배상금을 받게 됐다. 총 145억8000만원가량이 인정됐다.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된 것은 1987년 검찰 수사가 시작된 후 36년 만에 나온 것이다. 비슷한 손배소가 여러 건으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어 이번 선고는 향후 다른 형제복지원 관련 판결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26명에게 국가가 손해배상 비용을 지급하라고 승소 판결이 난 21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가 기자회견에서 손을 맞잡고 있다. 2023.12.21 한수빈 기자

형제복지원 사건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랑자를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일반 시민과 어린이를 불법 납치·감금한 사건을 말한다. 이들을 강제노역시키는 과정에서 구타와 성폭행, 암매장 등 잔혹한 인권유린이 가해진 사실도 알려졌다. 생존 피해자들은 “경찰과 공무원에 의해 끌려갔으며 공권력이 개입 또는 허가·묵인 아래 인권을 침해당했다”고 증언해 왔다.

재판부는 위자료 산정의 근거에서 국가 책임을 명시했다. 재판부는 “공권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허가·지원·묵인 하에 장기간 이뤄진 인권침해 사안으로, 다시는 유사한 인권침해 행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억제 예방할 필요가 큰 점, 국가의 관리·감독 소홀과 시간의 경과 등으로 객관적 증거가 소실된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했다. 또 “피해자들이 극심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겪은 것으로 보이고 상당수는 미성년자 상태에서 납치돼 학습권이 침해됐다”고 했다.

재판부는 형제복지원의 운영 근거가 된 내무부 훈령이 위법하기에 강제수용 또한 적법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내무부가 1975년 제정한 ‘부랑인의 신고·단속·수용·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처리지침’(내무부 훈령 410호)에서는 시·군·구청과 경찰이 합동으로 구성한 단속반이 부랑인으로 지목한 사람을 형사 절차에 의하지 않고 무기한 강제수용할 수 있도록 했다. 재판부는 “법률유보, 명확성, 적법절차, 영장주의 원칙을 위반한 위헌·위법적 훈령”이라고 했다.

지난해 8월24일 중구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열린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 진실규명 결정 발표 기자회견에 참석한 피해 생존자 연생모씨가 정근식 위원장의 발표를 들으며 괴로워하고 있다. 김창길기자

정부는 재판에서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 사건은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에 해당하고, 법리에 따르면 장기소멸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민간인집단희생 사건이나 중대한 인권침해 등의 피해자가 낸 국가배상 청구소송에서 장기소멸시효 제도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본 헌법재판소 결정에 근거한 판단이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법적 테두리 안에서 국가폭력의 희생자로 인정받기까지는 36년이 걸렸다. 1987년 검찰 수사로 형제복지원의 실태가 드러나 원장 박인근씨(2016년 사망)가 재판에 넘겨졌으나, 법원은 특수감금 등 박씨의 주요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한동안 잊힌 사건은 2018년 부산사회복지연대가 형제복지원 수용자 126명의 신상기록 카드를 입수해 공개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문무일 당시 검찰총장은 과거 판결을 바로잡아 달라며 비상상고를 냈으나 대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을 1호 사건으로 접수하고 지난해 8월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 강제노역, 구타 등 학대로 사망한 사람만 657명으로 확인됐다. 진실화해위는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로 판단했고, 이번에는 사법부가 국가의 책임을 처음 명시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판결을 환영하며 정부가 판결에 불복해 항소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냈다. 황정복씨는 “빼앗긴 시간을 돈으로 절대 해결할 수야 없겠지만, 이제라도 우리의 피해를 인정해줘서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정부가 법원 판결을 존중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별도로 소송을 제기해 내년 초 선고를 앞둔 형제복지원 피해자 이향직씨(52)도 이날 법원에 나와 “법무부는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고통을 인정하고 절대 항소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강은 기자 eeu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