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는 ‘3자 변제안’ 밀어붙이는데···재차 “일본 기업 책임” 인정한 대법원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21일 대법원 판결은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취지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대법원은 일본 정부 주장과 달리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강제동원 피해자 개인의 손배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재확인했다.
이번 소송의 원고들은 일제강점기였던 1910~1940년대에 일본에 소재한 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 공장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을 했다. 10·20대의 어린 나이였지만 일본 측의 강압·회유에 의해 노동에 동원됐고, 일하다 다치거나 죽기도 했다. 일본제철 피해자들은 2013년 3월, 미쓰비시중공업 피해자들은 2014년 2월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손해를 배상하라는 소송을 한국 법원에 냈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이유로 일본 측이 식민지배에 따른 책임을 회피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취지를 따랐다. 일본 기업들은 청구권 협정으로 피해자 개인의 손배 청구권은 소멸됐다고 주장했다. 2018년 대법원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대한 강제동원 피해자의 위자료 청구권은 청구권 협정의 적용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번 사건의 원심 재판부도 같은 판단을 했고, 대법원은 “이 같은 판단에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 및 효력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게 없다”고 밝혔다.
원고들이 2012년 대법원이 배상 인정 판결을 한 이후에 소송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손배 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볼 수 있는지는 새로운 쟁점이었다. 2018년 대법원 판결의 원고들은 2000년대에 소송을 제기했는데, 이번 소송은 피해자들이 너무 늦게 소송을 내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게 일본 기업 측 주장이었다. 일부 하급심에서도 이 쟁점에 대한 판단이 엇갈렸다. 대법원은 이번에 처음으로 일본 기업 측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명시적인 판단을 했다.
대법원은 2012년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에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배 청구권이 포함되는지를 둘러싸고 국내외에서 계속 논란이 됐다고 짚었다. 대법원은 청구권 협정의 당사자인 일본 정부가 청구권 협정으로 피해자의 손배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일본 기업들도 이에 동조하면서 배상을 거부한 점도 거론했다. 즉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손배 청구권의 존재와 피해 구제 가능성을 인식하고 당연히 손배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상황은 아니었다는 게 대법원 판단이다.
특히 대법원은 “대한민국 정부는 남은 사법절차를 지켜봐야 한다는 것 외에 별다른 공식적인 입장 표명은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의 이 같은 판단은 피해 구제를 위한 사법적 절차에 수십년이 걸린 강제동원 사건의 특수성을 피해자 관점에서 고려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피해자 대리인단의 이상갑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일본에서 한 번도 판결이 없었던, 처음부터 한국에서 권리구제 절차가 시작된 사건들에 대한 첫 판결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했다. 이번 판결은 현재 법원이 심리 중인 유사 소송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승소 가능성에도 긍정적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관계자는 “2012년 대법원 판결 이후 2013·2014년 제기된 소송에서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강제동원으로 인한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다고 인정한 것”이라고 판결 의의를 설명했다.
윤석열 정부가 2018년 대법원 판결을 수긍하지 않는 태도를 내비치면서 ‘제3자 변제’ 방식을 밀어붙이는 상황에서 이날 판결이 나왔다는 의미도 있다. 정부는 일본 기업을 대신해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 재단을 통해 배상하겠다며 법원에 공탁을 냈지만 1심 법원의 공탁관들이 줄줄이 ‘불수리’ 결정을 했고, 1심 법원의 판사들도 정부의 이의신청을 기각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김혜리 기자 ha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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