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OTT가 극장 위협? 좋은 영화는 천만 관객 부른다"
초등학교 때 갑자기 집안이 어려워졌다. 친구 생일파티에 초대됐지만 선물 살 돈도 없었고 구멍 난 양말을 숨겨야 했다. 매일 돈을 버는 택시기사가 부러웠다. 미술에 재능이 있었지만 미대에 진학하진 못했다. 학원비를 벌기 위해 카페에서 서빙 알바를 하던 스물한 살, 우연한 기회로 카메라 앞에 처음 섰다. 국민 드라마 '모래시계'(1995)에 여주인공의 보디가드로 등장한 이 청년은 과묵한 눈빛으로 한순간 청춘스타로 떠올랐다. 배우 정우성과 함께한 '태양은 없다'(1999)로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배우 인생을 걸어왔다.
숱한 작품들을 거치며 울고 웃었다. 흥행 실패의 쓴맛도 봐야 했고 빚더미에 앉은 적도 있었다. 결국 2016년 정우성과 손잡고 배우들을 위한 회사, 아티스트컴퍼니를 설립했다. 그리고 6년 뒤, 꼭 50세가 되던 지난해 주연으로 참여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를 뜨겁게 달궜다.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상인 에미상 6관왕을 달성하며 한국은 물론 비영어권 콘텐츠의 역사를 새로 썼다. 같은 해 각본과 연출을 맡은 그의 감독 데뷔작 '헌트'는 칸 영화제에서 공개되는 영예를 안았고, 흥행에도 성공해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까지 안겨줬다. 전 세계에서 러브콜이 쏟아졌다.
올해 데뷔 30주년을 맞은 배우 겸 감독 이정재(51)는 최근까지 영국 런던에서 미국 할리우드 제작 드라마 '스타워즈: 애콜라이트'의 주연으로 촬영을 했다. 극비에 부쳐진 이 작품은 내년 디즈니플러스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이후 한국에 돌아온 그는 현재 대전의 세트장에서 '오징어 게임' 시즌2 촬영에 매진하고 있다. 글로벌 톱스타 반열에 올랐지만 정작 그는 "글쎄요"라는 말로 담담하게 운을 뗐다.
이정재는 매일경제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런던에 머무는 동안 K콘텐츠는 이제 막 시작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며 "오로지 K콘텐츠, 그러니까 영화·드라마를 만드는 일에만 열중할 것이고 재미있고 감동적인 영화·드라마를 만드는 일이라면 어떤 역할이라도 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그는 오랜 고민 끝에 이달 초 인공지능(AI)·빅데이터 기업 와이더플래닛의 최대주주로 경영권을 인수했다. 아티스트컴퍼니의 정우성,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제작사 위지윅스튜디오와 함께다. 빅데이터 분석을 기반으로 세계 시장에 내놔도 경쟁력 있는 K콘텐츠를 선보이겠다는 목표다.
―에미상 수상 이후 어떻게 지냈나.
▷런던에서 '스타워즈'도 찍고 (한국에) 오자마자 '오징어 게임' 시즌2를 계속 찍고 있다. 본의 아니게 올해는 촬영만 하느라고 뭐 하나 공개되는 것 없이 한 해가 훌쩍 지나간 것 같다.
―'스타워즈'를 선택한 이유는.
▷'스타워즈'는 고민을 깊게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 담벼락에 붙어 있던 스타워즈 포스터들이 제일 먼저 기억이 났다. 다만 영어가 유창하지 않았는데 다행스럽게도 연출자분과 관계자분이 그 정도면 자기들 입장에선 같이 해볼 수 있다고 용기를 주셨다. 또 제가 더 잘할 수 있게끔 코칭 스태프들을 붙여주셔서 도움을 많이 받고 잘 끝마치고 오게 됐다.
―미국 할리우드 진출 소회는.
▷'영화하는 사람들은 다 비슷비슷하구나'를 가장 크게 느낀 거 같다. 한국의 영화 현장이나 미국의 영화 현장이 아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영화를 다 좋아하고, 그 일에 굉장히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끼리 모이다 보니 느낌, 생각이 비슷했다. 정말 최고의 스태프들이 다 모였다. '역시 스타워즈구나'. 작은 한 컷이라도 소중하게, 최고의 환경에서 촬영해야 잘 찍을 수 있다는, 그런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는 게 굉장히 강하게 느껴졌다. 근데 이건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몸이 피곤하고 힘들어도 혹은 내 시간과 나의 그 무엇을 조금이라도 더 영화에 신경 쓰고 할애하겠다는 그런 정신은 그쪽 스태프나 우리 스태프나 같았다.
―세계적으로 K콘텐츠의 위상은 어느 정도에 와 있다고 보는지.
▷대단하다고 느낀다. 런던에서 스태프들이 한국 콘텐츠 얘기를 하면서 "너 그거 봤어? 그 작품 어땠어? 거기 나온 배우 알아?" 이런 식으로 예능, 드라마 혹은 영화들도 계속 묻더라. '저건 나도 못 봤는데 저걸 어떻게 알지?' 할 정도로 해외 분들이 우리 콘텐츠에 대해 너무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심지어는 호텔에 있는 직원분들도 제가 지나가면 "오늘 한국의 무슨 드라마 시즌2 나오는 날인데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프랑스, 미국 등 다른 나라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에서 감독 활동 계획도 있는지.
▷연출로서 제안은 한 번 받았는데 오징어 게임(시즌2) 촬영 때문에 승낙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아티스트스튜디오(아티스트컴퍼니의 제작 스튜디오)에서 제작하는 게 먼저니까. 회사에서 기획·제작하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런 것들을 지금 하나씩 해나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오징어 게임' 시즌2에 거는 기대는.
▷시즌1 때 워낙 많은 분들이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그만큼 기대에 부응하고자 열심히 찍고 있다. 아직 한창 촬영 중이고 공개될 때까지 수많은 과정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지금 찍고 있는 한 컷 한 컷, 한 장면 한 장면이 저희가 계획한 대로 잘 찍히길 바랄 뿐이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중심으로 국내외 콘텐츠 시장이 변했다.
▷그동안 사실 OTT로 시장이 많이 기울어서, 혹은 팬데믹 때문에 극장가가 회복되지 않고 있다는 시각이 많았다. 그런데 '역시 좋은 영화는 (관객들이) 극장에 오셔서 보시는구나'라는 것을 방증하는 아주 좋은 예가 '서울의 봄'이다. 지금 천만 관객을 목전에 두고 있다. 영화인들은 '서울의 봄'이 성과를 내고 있는 것에 희망을 갖고 있다. '관객분들이 원하는 수준의 콘텐츠를 보여드린다면 제2의, 제3의 서울의 봄이 또 나올 수 있겠구나'라는 걸 확인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일각에서는 OTT가 콘텐츠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그렇게 한쪽 시각으로 봐왔던 것이 좀 잘못됐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다. OTT가 한국 콘텐츠의 해외 진출 기회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해외 시장으로 콘텐츠를 알릴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고 그 방법들을 영화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알고 있다. 제일 첫 번째는 관객들이 재미있어 하고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콘텐츠를 우리가 먼저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예전에 한창 영화 부흥기라고 했던 그런 시대를 다시 맞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와이더플래닛에는 어떤 계기로 투자하게 됐나.
▷경영권 인수를 위한 투자다. 앞으로 경영을 맡아서 할 거다. 콘텐츠 사업을 좀 더 폭넓게 하기 위해서 양질의 자금 투자도 필요했고, 해외에서 경쟁해도 충분한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2년 전부터 좋은 회사를 만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런던에서 겪은 K콘텐츠 열풍이 이런 생각에 더 불을 지핀 것 같다. 제작사 위지윅스튜디오의 소개로 3사가 전략적 제휴를 맺고 콘텐츠 산업에 AI·빅데이터 플랫폼을 적용하는 방안을 협의해왔고, 관심을 갖고 만남을 이어가다 경영권 인수까지 하게 됐다.
와이더플래닛은 소비자들의 소비 행태·기호 빅데이터(비식별 데이터)를 분석하는 회사다. 우리도 세대가 바뀐 관객의 취향이나 향후 어떤 소재를 관객들이 재미있어 하실지에 대한 정보는 항상 필요로 했다. 이제는 영화 개봉 시점의 마케팅이나 홍보가 굉장히 중요한 시대가 됐고, 영화 시장이 회복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좀 더 체계적으로 관객분들의 니즈에 맞출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모멘텀이 있었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기획하면 흥행 요소가 일종의 공식이 돼서 콘텐츠의 독창성이나 다양성을 해치진 않을까.
▷많은 분야에서 AI가 굉장히 주목받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AI는 대부분 이미 벌어진 결과에 대한 데이터를 모아서 제시해 준다. 하지만 영화라는 것은 보지 못한, 느끼지 못한,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관객분들에게 드려야지만 흥미와 재미, 감동을 느끼실 수 있다. 그런 것을 AI로 먼저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AI를 통한 빅데이터 분석은 참고 정도로만 활용하려는 것이고, 전적으로 굉장히 크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이번 인수가 K콘텐츠의 글로벌 확산에는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인재들이 이 시장에서 빠져나가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인 것 같다. 지금 영화나 드라마의 편수가 급격하게 줄어들다 보니까 좋은 인재들이 다른 직업을 찾아서 떠나게 되는 일들이 굉장히 많다. 영화나 드라마는 다양한 사람들의 아이디어들이 모여 완성되는 합동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단 한 명이라도 아주 유능하고 아이디어가 참신한, 혹은 아주 열정적인 분들이 빠져나가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품 수를 다시 예전만큼 늘려야 하고 회복을 시켜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또 해외에서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그 정도 퀄리티의 콘텐츠를 계속 만들어야 된다는 게 내 결론이다. 그러려면 자본이 그만큼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아티스트컴퍼니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자본력으로는 좀 부족하기 때문에 상장사를 인수하는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거다.
―최근 엄청난 기대감과 함께 와이더플래닛 주가가 연일 상한가를 기록하며 작전주 논란을 일으켰는데.
▷조금만 더 신중하게 투자를 해 주셨으면 좋겠다. 아마 신중하게 투자하시는 분들 중에서는, 이 정도의 규모의 인원이 모여 일을 하는 다른 엔터테인먼트 회사들과 비교한다면 이것(와이더플래닛)이 어느 정도 수준이 적정한지는 대충 다 눈에 보이시지 않을까 싶다. 엔터주의 경우 이벤트성으로 투자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 회사로만 보신다면 여러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겠지만, 당부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런 한순간의 이벤트성 회사라고 보지 마시고 나와 정우성 씨가 엔터 비즈니스를 정말 더 본격적으로 하려고 새 집을 만들었다고 이해해 주시면 좋겠다.
―지난달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함께 찍힌 사진도 화제다. 현대고 시절부터 알고 지냈나.
▷그분하고의 질문은 좀 나중으로 좀 미루시면 좋을 것 같다. (나중이라면 언제가 돼야 하는지?) 글쎄.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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