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의 창] 메소포타미아의 겨울

2023. 12. 21.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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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문명도 언젠가는 시든다.

세계 4대 문명 발원지의 현재 상태는 모두 신통찮다.

이 지역은 서기 9세기 이란의 아바스왕조 시대에도 세계 최고의 문명지였다.

세계를 지배하는 문자와 종교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약소국들 땅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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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옥한 경제·교통 요지이자
바빌로니아·아바스의 무대
세계 최고 문명 꽃피웠지만
전쟁과 무력충돌로 시들어

찬란한 문명도 언젠가는 시든다. 세계 4대 문명 발원지의 현재 상태는 모두 신통찮다. 그중에서도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역은 차마 볼 수가 없다. 이 동네는 현재 이스라엘과 하마스, 헤즈볼라의 충돌로 시끄럽다. 이란도 웅크린 채 개입하고 있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두 강 사이란 뜻의 메소포타미아는 이라크, 튀르키예,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역을 포함한다. 지역의 모양이 초승달을 닮아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 불린다. 문명의 발원지는 현재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근처의 도시국가들이다.

창세기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가족은 원래 살던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 지역으로 들어간다. 우르는 초승달의 가장 오른쪽 남단에 위치한 도시이고 하란은 초승달 위쪽 아나톨리아(지금의 튀르키예)의 도시다. 가나안은 초승달의 왼쪽이다. 그러니 이들의 이동 경로는 비옥한 초승달 모양 거의 전체를 훑고 지나간다.

우르가 포함된 초승달 오른쪽 부분은 수메르, 바빌로니아 왕국의 무대로 문명의 핵심부였다. 이 지역은 아시리아, 히타이트, 페르시아 제국에 정복당하면서도 정복자가 피정복 지역에 동화되는 역사가 반복됐으며, 엄청난 문명의 격차로 인해 존중받았다. 기원전 6세기 초 유다 왕국이 바빌로니아에 정복돼 상류층 수만 명이 이 지역으로 강제 이주된다. 흥겨운 리듬과 애절함이 묘한 조화를 이룬 보니 M의 노래로도 유명한 바빌론 유수다. 강제 이주인데 재미있게도 아브라함의 고향 지역으로 돌아갔다. 바빌로니아는 유다의 종교를 탄압하지 않고 관대했던 것 같다. 이 시기에 쓰인 구약의 에스겔에는 유다 왕국이 하나님이 세운 바빌로니아 왕을 따르지 않고 이집트와 내통하니 벌을 내렸다는 내용이 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유대교는 비약적으로 체계가 잡힌다.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의 선진 문명과 페르시아의 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은 서기 9세기 이란의 아바스왕조 시대에도 세계 최고의 문명지였다. 당시의 바그다드 도서관은 세계 최고의 장서 목록을 자랑했고 지식인들로 붐볐다. '알고리즘'이란 단어는 당시 바그다드 도서관 소속으로 대수학의 원형이 되는 책을 쓴 과학자의 성 '알 콰리즈미'로부터 유래했다.

이집트,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히타이트, 페르시아 같은 강대국들의 무대 사이에 낀 지중해 연안 지역은 북이스라엘, 유다 등 약소국들의 무대였다. 당시의 대표 강국 이집트와 왕래를 하려면 히타이트,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모두 사막을 피해 이 지역을 거쳐야만 했다. 강대국에 끊임없이 시달리던 지역이었다. 대신 지중해를 면하고 있어 해상 무역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지역이 페니키아인데 지금의 레바논, 시리아 서부 지역과 겹친다. 페니키아는 지중해 전역에 상업 식민지를 두었다. 카르타고(현 튀니지)는 그중 가장 번성한 식민 기지였다. 로마와의 3차에 걸친 전쟁 끝에 소멸된다. 이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포에니 전쟁이라 부른다. 카르타고가 페니키아 사람들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복잡한 상업 거래를 기록하기 위해서는 문자가 필수적이다. 세계의 거의 모든 표음 문자는 페니키아 문자로부터 기원했다. 산스크리트어, 헬라어, 영어, 프랑스어 등이 다 여기에 포함된다. 세계를 지배하는 문자와 종교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약소국들 땅에서 나왔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의 발원지로 히타이트와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본산이었던 튀르키예, 페르시아 제국의 이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왕국의 이라크, 페니키아의 레바논, 시리아의 지금 상태를 보면 언제 그런 찬란한 문명이 있었나 싶다. 메소포타미아의 겨울이다.

[문병로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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