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티, 캐슬' 길고 어려운 아파트 이름…“10글자 한글로” 권고

이지현 기자 2023. 12. 21.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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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아파트, 개나리 아파트, 목화 아파트.

1970~80년대 지어진 아파트 이름들입니다. 짧고 기억하기 쉽죠.

'항동 중흥에스클래스 베르디카운티'

서울에서 가장 긴 아파트 이름입니다. 긴 데다 외래어도 많습니다. 주민들조차 전체 이름을 늘 부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한 부동산 정보 조사업체에 따르면 지난 2019년 분양된 전국 아파트 이름의 평균 글자 수는 9.84자에 달했습니다. 1979년 이전(평균 3글자)과 비교해 3배 넘게 길어진 겁니다.

길이만이 문제는 아닙니다. 다국적 언어가 결합해 뜻을 알기 어려운 신조어 이름도 있고, 옆 동네 이름을 붙인 탓에 아파트 위치가 혼란스러운 경우도 있습니다.

점점 길어지고 복잡해지는 아파트 이름에 결국 서울시는 '부르기 좋고 쉬운 이름을 짓자'며 권고안을 마련했습니다.

점점 길고 어려워지는 아파트 이름에 서울시가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공개했다. 사진은 기사와 무관한 자료사진.〈사진=연합뉴스〉

“한글로 10자 내외 이름 짓도록”…서울시 가이드라인



권고안 내용은 이렇습니다.

▲외국어 사용을 자제하고, 한글 이름을 발굴해 사용 ▲지역 옛 지명을 활용하며 법정동·행정동은 준수무분별한 펫네임(pet name) 활용 자제 ▲10자 내외 글자 수 준수 ▲다수가 선호하는 이름으로 제정하도록 노력

요즘은 아파트 이름을 '지역+건설사+브랜드+펫네임' 이런 방식으로 짓습니다.

여기서 브랜드는 래미안, 힐스테이트, 푸르지오 등 아파트 브랜드 이름을 말합니다.

펫네임은 해당 아파트의 주변 환경을 나타내는 일종의 '별칭'인데요. 한강공원 주변 아파트는 '리버파크', 산 옆은 '포레', 학교 주변은 '에듀'가 붙는 식이죠. 때로는 고급스러움을 강조하는 단어를 붙이기도 합니다.

잘만 지으면 아파트 특성을 부각하면서도 차별화된 이름을 지을 수 있는 방식입니다.

최근에는 지역+건설사+브랜드+펫네임으로 아파트 이름을 짓는 추세다. 사진은 기사와 무관한 자료사진.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서울 시내 한 아파트 이름에는 '아델리체(Adeliche)'라는 펫네임이 붙어 있는데요. 스페인어 Adelio(고귀한), 독일어 Adel(귀족, 품격), 영어 Cherish(소중히하다), 무려 3개국어가 합쳐진 명칭입니다. '품격 있는 사람들이 소중한 가족과 함께하는 고급 주거단지'라고 건설사는 홍보하죠.

펫네임을 다소 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파트 앞에 작은 개천이 흐르는데도 '리버뷰(River view·강 전망)'라는 이름을 붙이는 식입니다.

때로는 지역명에 아파트가 위치한 법정동이 아니라 옆 동네 이름을 붙이는 곳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서울 신정동과 신월동에는 '목동'을 붙인 아파트 이름이 다수 있습니다. 경기도 고양시에도 'DMC(서울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가 붙은 아파트 이름이 있죠.

이런 부작용이 과해지다 보니 서울시가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부르기 쉬운 아파트 이름을 짓자고 나선 겁니다.

꽃 이름부터 우리말 지명까지…아파트 이름 변천사


70년대 초 지어진 한강맨션 아파트. 당시 아파트 이름에 영어가 들어가자 서울시는 외래어 사용을 억제했다.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과거에도 아파트 이름 짓기에 정부가 나선 일이 있었습니다.

1974년, 서울시는 새롭게 건설되는 아파트에 외래어 사용을 억제했습니다. 당시 새로 지어지던 아파트에 '점보, 빌라, 렉스, 골든' 등 외래어가 많이 포함되자 "일반 서민 생활과 거리감을 가져온다"며 조치를 내린 겁니다. 고급 아파트를 일컫는 '맨션'도 억제하기로 했습니다.

대신 꽃 이름이나 나무 이름 등 우리말로 명칭을 바꾸도록 했죠.

그래서 등장한 게 1970~80년대에 지어졌던 장미아파트, 개나리 아파트, 목화아파트 등이었습니다. 정부 입김이 워낙 셌던 시절이라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이후 70년대 후반부터는 '동네이름+건설사 이름'으로 아파트 이름을 짓는 게 대세였습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 이런 식으로 말이죠.

1970년대에 찍힌 압구정 현대아파트 전경.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한동안 이어지던 이 흐름은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90년대 초반 분당 등 신도시 개발을 할 당시 정부가 천편일률적인 건설사 이름의 아파트 대신 우리말을 사용한 고유의 이름을 짓도록 했던 건데요. 분당의 푸른마을, 샛별마을, 평촌의 목련단지 등이 모두 이때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에는 아파트 브랜드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1998년 부동산 시장 부흥을 위해 정부가 아파트 분양가를 자율화하면서 고급 아파트들이 등장했기 때문인데요. 차별화를 위해 지금의 '래미안, 자이, 푸르지오'와 같은 브랜드 아파트들이 생겨났습니다.

이후부터는 아파트 주민들이 직접 이름 짓기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부동산이 가장 크고 중요한 자산으로 자리 잡으면서 보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이름 짓기 열풍이 불었습니다.

아파트 이름을 주민과 건설사가 자율적으로 짓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서울시가 권고안을 마련한 건 아파트 이름의 '공공성' 때문인데요. 아파트 이름은 지명이나 주소를 나타내기도 하고, 우편과 택배를 보내거나 문서 작성 시에도 쓰입니다.

서울시는 “아파트 명칭은 누구나 쉽고 부르기 편한, 지역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제정할 필요가 있다”면서 “다만 명칭 제정의 자율성과 공공성을 고려해 권고 수준의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름 좋다고 가치 높아지는 것 아냐”…건설사들도 동참


21일 서울시는 '공동주택 명칭 개선을 위한 시민 토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 9개 건설사와 SH공사, LH공사가 참석해 공동주택 명칭 개선 동참 선언문에 서명했다. 〈사진=이지현 기자〉

서울시는 오늘(21일) '공동주택 명칭 개선안 마련 시민 토론회'를 열고 가이드라인을 공개했는데요. 이날 토론 내용을 바탕으로 최종안을 완성해 내년 초 각 자치구에 배포할 예정입니다.

다만 당장 아파트 이름이 극적으로 변화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입니다.

토론회에 참석한 업계 관계자는 “현장에서 재건축 조합원들을 만나보면, 아파트 이름이 길고 어렵다는 데에는 공감하면서도 내 아파트 이름을 쉽고 간결하게 짓는 건 곤란하다고 말한다”면서 “오히려 '사교육에 문제 있다고 자식 학원 안 보내냐'고 반문한다”고 말했습니다.

건설사 입장에서도 주민이나 조합원들 대다수가 원하는 이름이라면 거부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죠.

인식이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많은 연구에서 아파트 이름이 가격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대형 건설사 브랜드 이름은 가격에 영향을 줄 수 있지만, 펫네임이나 지역명을 바꾸는 건 가격 상승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죠.

김현경 한양사이버대학교 마케팅학과 교수는 “브랜드 이름은 알기 쉽고 부르기 쉽고, 짧은 게 제일 좋다”면서 “아파트 가치를 만드는 건 이름보다는 건설사가 좋은 집을 만들었을 때, 주민들이 좋은 환경을 만들었을 때”라고 지적했습니다.

신민규 삼성물산 건설부문 부장은 “특히 옆 동네로 지명을 바꾸는 건 시장에 대한 기만행위”라면서 “건설사들도 아파트 품질은 엉망으로 만들고 이름만 화려하게 지어 소비자와 고객을 기만하지 않아야 한다”고 꼬집었습니다.

이날 토론회에는 9개 민간 건설사와, SH공사, LH 공사 등이 참석해 '공동주택 명칭 개선 동참 선언문'에 서명했습니다.

김장수 서울시 공동주택지원과장은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졌으니 적어도 건설사가 주민분들에게 이를 설명하고 설득할 명분은 생겼다고 본다”면서 “적어도 여기에 참여한 건설사들은 가이드라인을 잘 준수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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