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레이온 산재 피해, 문화·예술로 치유해요"
30여년간 서예·회화·사진 매진
마음 다스리고 안정 되찾기 노력
600여 피해자중 10%가 문화활동
"노사 존중해야 경쟁력 향상" 강조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대한민국 최악의 산업재해로 손꼽히는 ‘원진레이온’ 사태의 피해자로서 지난 30여 년간 서예·회화·사진 활동을 통해 치유하는 과정을 거쳐왔습니다.”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자인 윤한기 한국서가협회 초대작가는 최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원진 산재 노동자의 극기 표현’이라는 주제로 열린 전시회장에서 서울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피해자들을 치료해온 녹색병원, 고대안암병원, 서울대 보라매병원 등 8개 병원의 의사들이 공통적으로 ‘낙심하지 말고 문화·예술 등 취미 생활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고 안정을 찾으라’고 조언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원진레이온 사태는 경기도 남양주시 도농동 인조 견사 생산 공장에서 지속적으로 이황화탄소가 누출돼 노동자들이 대거 가스에 중독되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이황화탄소에 오랫동안 노출되면 뇌경색이나 말초신경 손상, 신경염, 콩팥 기능 장애, 정신 장애, 실명, 우울증, 언어 장애, 반신·전신 마비, 정신 이상 등이 초래된다. 당시 산업재해로 인해 직업병 판정을 받은 피해자 중에서만 8명이 숨지고 916명이 장애 판정을 받을 정도로 대규모 피해가 발생했다. 직업병으로 인정받지 못한 피해자도 적지 않다. 우여곡절 끝에 1~14등급의 직업병 판정을 받은 피해자들 가운데 현재 593명이 생존해 매달 한두 번씩 병원을 찾아 상담받고 약을 먹으며 버티고 있다. 윤 초대작가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우리 산업 현장에서는 노동자의 인권은 완전히 무시된 채 이윤 추구에만 매달렸다”며 “한 프레스 공장의 사장은 ‘프레스 기계 한 대 하고 너희 공돌이 열 명의 목숨과도 안 바꾼다’는 막말을 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원진레이온 사태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직업병의 심각성을 일깨운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앞서 일본에서 수많은 카드뮴 중독 피해자를 낳은 이타이이타이병 사건, 인도에서 무려 2만 5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보팔 가스 누출 참사 같은 대형 산업재해가 있었지만 원진레이온 사태로 인해 다시 한번 산업재해가 국제적인 이슈가 됐다. 현재 세계보건기구(WHO) 기준국장으로 활동하는 김록호 박사(가정의학·산업의학전문의)와 녹색병원장을 지낸 양길승 원진직업병관리재단 이사장 등이 피해자들의 직업병 판정을 이끌어내는 데 헌신적으로 나섰다. 양 이사장은 “우리 사회에서 처음으로 한 공장에서 직업병이 집단적으로 발생해 직업병 관리라는 역사적 과제를 환자들이 앞장서 해결해나간 획기적인 사례”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직업병에 관한 국제 교류를 할 때 원진레이온 피해자들의 서예 작품 등을 선물하면 경탄을 금치 못한다고 전했다.
현재 원진산업재해자협회에 소속된 600여 명의 피해자 중 10%가량이 그림, 서예, 하모니카, 북·장구 등 문화 활동을 통해 치유에 나서고 있다. 윤 초대작가는 “당시 우울증과 만성피로증에 시달리며 낙심해 있을 때 아들이 ‘사진도 찍고 활동하시라’며 고급 카메라를 선물했다”면서 “한문 공부와 서예 활동에도 매진하며 정신적으로 상당히 평온함과 안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소개했다. 이번 전시회에서 그는 ‘인형중수(仁形衆水·어진 마음은 형체가 없고 맑은 물은 무리가 없음)’ 같은 서예 작품과 ‘삼신합덕(三神合德·천지 만물이 음양의 조화를 통해 자연적으로 합덕을 이룸)’ 같은 회화 작품까지 수십 종의 서예·회화·사진을 선보였다.
윤 초대작가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만행, 한국전쟁기 피란길의 참상, 전후 보릿고개와 개발 독재 시절까지 격동의 세월을 겪었다”며 “오늘날 선진국으로 도약한 조국의 현실이 너무 고맙다. 다만 노사가 서로 존중하며 화합을 꾀한다면 기술 패권 시대에 산업 경쟁력을 훨씬 더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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