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많고 탈 많던’ 내년도 R&D 예산, 결국 전년比 4.6조 줄었다

유병훈 기자 2023. 12. 21.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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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와 비교해 4조6000억원 삭감된 26조5000억원
정부안 대비 6000억원 증액… 신진 인력 인건비 보조 ‘집중’
과학계 “삭감액이 훨씬 커… 생색내기용 아닌가”
국회 본회의/뉴스1

2024년도 연구개발(R&D) 예산안이 21일 국회에서 처리됐다. 지난해보다 크게 줄며 국내 과학계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연구개발(R&D) 예산은 결국 지난해와 비교해 4조6000억원 삭감된 26조5000억원으로 책정됐다.

여야는 이날 오후 4시 30분쯤 본회의에서 내년도 예산안을 처리했다. 당초 오전 10시 본회의를 열고 처리할 예정이었으나, 기획재정부의 시트 작업(예산명세서)이 늦어지면서 오후로 순연됐다.

과학기술계 초유의 관심사였던 R&D예산의 경우 올해(31조 1000억원) 대비 15%가량 삭감됐다. 이에 따라 R&D 예산이 정부 총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4.9%에서 3.9%로 줄었다. 한국의 R&D 예산이 줄어든 것은 33년 만에 처음이다.

당초 정부안은 올해 대비 5조2000억원 삭감된 25조9000억원 규모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월 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 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면서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을 질책한 것으로 전해진 이후, 과기정통부는 ‘R&D 혁신’이라는 명목하에 대대적 R&D 예산 삭감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과기정통부는 사상 처음으로 국가 R&D 예산 배분·조정 내역의 제출 법정기한을 넘기면서까지 전면 재검토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과학기술계는 물론 야당까지 거세게 반발하자 윤 대통령은 지난달 2일 “재임 중 R&D 예산을 늘려나가겠다”며 과기계 달래기에 나섰고, 여당도 일부 증액을 검토하기로 했다.

결국 여야 원내대표는 전날 R&D 예산을 정부안보다 6000억원 증액시키는 데 합의했다. 합의문에는 현장 연구자의 고용불안 해소, 차세대 원천기술 연구 보강, 최신·고성능 연구 장비 지원 등의 항목이 증액 대상으로 포함됐다.

이날 공개된 예산안에 따르면, 6000억원의 정부안 대비 증액분 중 연구 인력의 고용불안을 해소하는 데 5230억원 가량이 대거 투입됐다. 예산 삭감으로 신진 연구인력들이 학계에 안착하기 어려울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자, 이 분야를 집중 보강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정필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내년 R&D 예산 정부원안에 따른 연수직 인력 감축 규모는 약 1200명 이상으로 예상됐다. 정부출연 연구소 연수직은 박사후연구원(Post-Doc)과 학생연구원(학·석·박사생), 인턴 등으로 구성된다.

고용불안 해소 명목의 증액분 중에는 기업 R&D 종료 과제 내 인건비 한시 지원이 1782억원으로 규모가 가장 컸다. 이를 통해 1만6000명의 연구 인력 인건비가 확보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 집행 후 잔여 사업비는 초저리 융자(최저 0.5%)로 전환해 사용키로 했다.

1200명 규모의 박사후연구원 연구 사업을 신설하는 데 450억원, 대학원생 1000명의 장학금·연구장려금 확충에 100억원이 추가 투입된다. 이 밖에도 기초연구 과제비 추가지원이 1528억원, 연구과제중심제도(PBS·인건비의 일부를 인건비가 아닌 연구과제비로 충당하는 제도) 비중이 큰 출연연구기관의 인건비 출연 예산이 정부안 대비 388억원 늘어났다.

기초연구연합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천승현 세종대 물리천문학과 교수는 “당초 기초연구 예산은 삭감보다는 1억원 이하 연구 사업이 사라져 신진 연구자가 성장할 수 있는 ‘연구 사다리’가 사라졌다는 문제가 가장 컸다”며 “이번에 확보된 예산으로 얼마큼의 연구 사다리를 회복할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부품 가격이나 전기료가 올라가 운영에 어려움을 겪던 대형 연구시설 예산도 434억원 늘었다. 과학계에서는 최근 치솟은 전기료로 장비 운영이 중단되는 일이 빈번했다. 지난 8월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의 초고성능 컴퓨터 ‘누리온’ 시스템의 일부 서버가 전원을 내렸고, 지난 10월에는 포항방사광가속기연구소가 12월 가동을 축소한다고 예고하기도 했다.

조성경 과기정통부 1차관은 지난 10월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전기료 문제로 중요 연구 시설이 가동을 중단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 “전기료 문제는 충분히 해결하도록 할 것”이라고 답한 바 있다.

미래 먹거리와 직결된 첨단 기술에도 부분 증액이 이뤄졌다. 달 탐사, 6G 통신, K-UAM 모빌리티 등 차세대 기술에는 정부안 대비 188억원의 예산이 더 투입된다. 윤석열 대통령의 역점 사업이었으나 민주당이 일방 삭감했던 원전 관련 R&D 예산도 원전 안전성과 부품 경쟁력 강화 등 원천기술 투자에 148억원이 증액됐다.

과학계에서는 이번에 처리된 예산안에서 일부 증액이 이뤄졌으나, 실질적으로 체감할 수준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삭감액에 비해 증액 폭은 한참 작기 때문이다.

전국과학기술연구전문노동조합(과기연전) 관계자는 “결론적으로 내년도 R&D 예산은 올해보다 4조6000억원 삭감된 셈”이라며 “신진 연구자 지원 예산을 늘렸더라도 정작 연구 과제 예산이 삭감돼 연구를 할 수 없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국회의 예산 증액은 생색내기용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천 교수는 “국회에서 내년도 R&D 예산이 일부 회복된 것은 맞지만, 아직 삭감된 부분을 회복하기에는 많이 부족할 것으로 보인다”며 “계속 과제 예산 삭감이나 신진 연구자 지원을 위한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인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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